안민욱 작가는 주로 관객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퍼포먼스의 장을 만들어 왔는데, 이는 관객의 최종적인 참여를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일종의 무대를 작가가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전시/설치 이후 관객이 그 속에 위치하고 나서야 무대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 이는 아르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카페와 같은 빈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찾는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건축(설치)을 퍼포먼스의 장으로 변형시켰던 <아르스 카페>에서부터, 전시장을 하루 나이트클럽으로 바꾸어 이성 간의 즉석 만남을 주선하는 웨이터로 작가가 직접 변신한 <알스비안 나이트>까지 연장되고 있었다. (참고로 아르스는 2008년 작가가 예술가의 비고용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세운 예술적 회사로, 이후 아르스 카페는 크게 보면, 관객의 참여를 발생시키는 장<아르스 영어 예술 학교>(2014, 영어로만 대화가 가능한 대원칙이 적용되는 공간)이거나 다른 예술가들의 퍼포먼스가 가능하게 하는 여러 프로젝트와 연동되는 장소<아르스 카페2>(2014)가 되는데, 후자의 경우 단순한 협업이 아닌 일종의 고용 상태로서 맺어진 계약 관계에 가깝다.)

 

설치 그 자체로는 작가가 의도하는 관객의 다양한 참여 방식과 체험의 밀도를 높이기가 쉽지 않은 관계로, 그간 활동에 비해 이번 무대에는 채워지지 않는 시간이 느껴진다. <마스터 베이비>는 홍천 읍내의 경제 인구의 주요한 일군을 이루는 군인들을 주목하여 그들이 홀로 자위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전시장 안에 만든다는 콘셉트인데, 이는 20일 가량의 전시 안에서 가시적으로 측정/집계되기 어려운 채 흩어져 버리는 감이 있는 것이다. 이는 관계 맺기가 아닌 군인 각자에게 개인의 자의식을 부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위=개인적/사적 공간이라는 등식은 전시=공적 공간이라는 전제와 양립 가능한가.

 

카모플라주 패턴은 그대로 유지한 채 국방색으로 불리는 초록색 계열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분홍색 계열의 구조물은, 분홍공장이라는 레지던스를 은유하는 작가의 농담이 섞인 결과물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폭력적인 집단의 상징성을 전복시키는 측면에서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안의 백색 공간, 칸막이를 친 개인의 단절된/독립된 공간은 개인의 시간을 일견 부여하는 듯하다. 하지만 젤과 휴지, 비닐봉지가 든 휴지통까지 갖추고 있음에도 내부에는 자위를 촉발시킬 어떤 물리적 매개체 역시 없는 데다, 무엇보다 일종의 공적 공간으로서 밝은 방이라는 작품의 형식적 틀이 군인을 지시하고 분리함으로써, 설치는 군인을 식별하고 소외시키며, 군인에게 안온한 자위의 체험 대신 자위로의 완전한 몰입이 불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더 적절해 보인다.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이러한 설치는 개인적인 공간이 유일하게 없는 군대라는 장소를 우회하며 결국 비판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군인들에게는 이 장소가 심리적인 부담을 주며 통과하거나 물리적인 수행을 통해 행복권을 달성하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 기호가 뒤따를 것이다. 군인이 아닌 관객에게는 이 장소가 참여할 수 없는 불가능의 지표이거나 호기심을 부르는 관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몇 가지 변수를 고려할 수 있음에도 어떤 직접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 작품은 실제 조금 더 구체화된 매뉴얼들을 가진 채로 실제 군대에 설치되어야 비로소 완성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공적 공간 내에서 사적 자유가 부족한, 한편으로는 절실한 국내의 현실을 지시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설치가 실제 자위로 이어지기에는 힘들다고 해도, 관람객에게 어떤 체험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방에 들어가 조명을 켰을 때, 아무도 없는 방이 나를 맞아주는 느낌이 들고 곧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휩싸이게 된다. 동시에 바깥에서는 “ENGAGED”가 반짝이며 안에 누군가가 있음을 지시하고, 작가의 손을 석고로 뜬 손이 방향을 아래로 가리킨 채 움직인다. 살짝 모아 쥔 손은 안의 행위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위를 외재화하는 셈인데, 안에서는 다시 기계손의 자위를 청취하는 셈이 된다. 곧 어떤 자극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극은 시청각이 합치되는 바깥에서 또 다른 체험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완전히 이 공간이 내외부적으로 닫힌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안민욱의 그간 퍼포먼스/설치 작업들은 관객을 주체로 삼으며 작가가 완전히 사라진다기보다는, 매개되지 않는 관객을 가시화하며 작가의 위치를 연출자로서 포함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곧 이 작업은 일종의 특정 계층 혹은 직업군을 대상으로 한 공공적 성격의 작업으로 환원된다기보다는, 집단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된 개인을 재위치시키며 자유가 절대적으로 없는 개성 없는 일자들의 집단과 분열증을 앓는 개인들의 편차가 만드는 불화의 공동체의 간극을 드러냄으로써 더 넓은 층위의 공공을 재조립/구성하는 위치 조정자로서 희미하게 작가가 존재한다.

 

최근 홈리스의 도시(2016)에서 선보였던, ‘집이 없는(Homeless)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집(Home)을 빼고 남겨진 뭐 없는(-less/without) 상태를 조형적으로 시각화한’ <뭐 없는 것 네가지>(2016), 이번 작업의 흥미로운 참조점을 이룬다. 집의 순수 물리적 요소들, 곧 불투명함, 계단, , 밑을 각각 투명하게 아크릴로 마감하여 드러내며 원래의 용도와는 멀어지며 기괴한 공간이 되는데, 이로써 쓸모를 잃어버린 부유하는 공간의 단편들을 지닌, 어디에도 없는 집을 구성한다.

 

(Home)과 없음(Less)을 각각의 두 단어로 분리하고 결합한 결과는, ‘홈리스라는 사회학적이고 실제적인 이름이 아닌, 추상적이고 물리적인 순수한 상태로 나타난다. 이를 결국 관객에게 집이 없음의 상태를 직면하게 하여 홈리스의 체험을 안기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일차적으로는 사회 현상에 대한 부조리의 알레고리를 보여주고, 다음으로 통상의 사회학적 재현의 문제에서 벗어나며, 마지막으로 관객의 직접적인 체험만을 전시의 조건에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질은 군대에서의 자위하기 힘든 조건을 가시화하는 가운데, 곧장 대안으로 이어지는 비판의 기조를 띠기보다는, 그 같은 사회적 현상 자체에서 체험의 조건을 도출하며 관객을 직접 향하는 이번 작업에서 거의 유사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일어날 수 있는(사실 일어나지 않은) 개별적인 자위행위들은 결국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소급되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취급되며 구체적인 기록들은 쓰레기통 안의 흔적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업은 자위 공간으로 기능하기보다, 자위를 하기 힘든 환경에서 사는 군인들의 열악한 지위, 나아가 자위라는 것을 은폐하는 문화를 비판적이기보다 우화적으로(‘자위의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자위 공간’) 드러낸다. 그리고 미술관 안의 또 다른 안(‘폐쇄 공간’)을 만드는 가운데 개별자로 환원된 현대 미술관 속 관객의 지위를 검토하며 또 다른 부조리의 상황을 연출한다. 방에 있는 동시에 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바깥의 조명과 기계손이 작동됨으로써, 바깥의 사람에게 노출된다. 그리하여 순수한 개별자(관람객)의 지위는 깨지고 이들 간의 암묵적 관계가 형성된다.


김민관(아트신 편집장)

 

 

Posted by ars2008 트랙백 0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