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욱 작가는 주로 관객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퍼포먼스의 장을 만들어 왔는데, 이는 관객의 최종적인 참여를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일종의 무대를 작가가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전시/설치 이후 관객이 그 속에 위치하고 나서야 무대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 이는 아르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카페와 같은 빈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찾는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건축(설치)을 퍼포먼스의 장으로 변형시켰던 <아르스 카페>에서부터, 전시장을 하루 나이트클럽으로 바꾸어 이성 간의 즉석 만남을 주선하는 웨이터로 작가가 직접 변신한 <알스비안 나이트>까지 연장되고 있었다. (참고로 아르스는 2008년 작가가 예술가의 비고용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세운 예술적 회사로, 이후 아르스 카페는 크게 보면, 관객의 참여를 발생시키는 장<아르스 영어 예술 학교>(2014, 영어로만 대화가 가능한 대원칙이 적용되는 공간)이거나 다른 예술가들의 퍼포먼스가 가능하게 하는 여러 프로젝트와 연동되는 장소<아르스 카페2>(2014)가 되는데, 후자의 경우 단순한 협업이 아닌 일종의 고용 상태로서 맺어진 계약 관계에 가깝다.)

 

설치 그 자체로는 작가가 의도하는 관객의 다양한 참여 방식과 체험의 밀도를 높이기가 쉽지 않은 관계로, 그간 활동에 비해 이번 무대에는 채워지지 않는 시간이 느껴진다. <마스터 베이비>는 홍천 읍내의 경제 인구의 주요한 일군을 이루는 군인들을 주목하여 그들이 홀로 자위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전시장 안에 만든다는 콘셉트인데, 이는 20일 가량의 전시 안에서 가시적으로 측정/집계되기 어려운 채 흩어져 버리는 감이 있는 것이다. 이는 관계 맺기가 아닌 군인 각자에게 개인의 자의식을 부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위=개인적/사적 공간이라는 등식은 전시=공적 공간이라는 전제와 양립 가능한가.

 

카모플라주 패턴은 그대로 유지한 채 국방색으로 불리는 초록색 계열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분홍색 계열의 구조물은, 분홍공장이라는 레지던스를 은유하는 작가의 농담이 섞인 결과물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폭력적인 집단의 상징성을 전복시키는 측면에서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안의 백색 공간, 칸막이를 친 개인의 단절된/독립된 공간은 개인의 시간을 일견 부여하는 듯하다. 하지만 젤과 휴지, 비닐봉지가 든 휴지통까지 갖추고 있음에도 내부에는 자위를 촉발시킬 어떤 물리적 매개체 역시 없는 데다, 무엇보다 일종의 공적 공간으로서 밝은 방이라는 작품의 형식적 틀이 군인을 지시하고 분리함으로써, 설치는 군인을 식별하고 소외시키며, 군인에게 안온한 자위의 체험 대신 자위로의 완전한 몰입이 불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더 적절해 보인다.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이러한 설치는 개인적인 공간이 유일하게 없는 군대라는 장소를 우회하며 결국 비판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군인들에게는 이 장소가 심리적인 부담을 주며 통과하거나 물리적인 수행을 통해 행복권을 달성하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 기호가 뒤따를 것이다. 군인이 아닌 관객에게는 이 장소가 참여할 수 없는 불가능의 지표이거나 호기심을 부르는 관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몇 가지 변수를 고려할 수 있음에도 어떤 직접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 작품은 실제 조금 더 구체화된 매뉴얼들을 가진 채로 실제 군대에 설치되어야 비로소 완성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공적 공간 내에서 사적 자유가 부족한, 한편으로는 절실한 국내의 현실을 지시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설치가 실제 자위로 이어지기에는 힘들다고 해도, 관람객에게 어떤 체험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방에 들어가 조명을 켰을 때, 아무도 없는 방이 나를 맞아주는 느낌이 들고 곧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휩싸이게 된다. 동시에 바깥에서는 “ENGAGED”가 반짝이며 안에 누군가가 있음을 지시하고, 작가의 손을 석고로 뜬 손이 방향을 아래로 가리킨 채 움직인다. 살짝 모아 쥔 손은 안의 행위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위를 외재화하는 셈인데, 안에서는 다시 기계손의 자위를 청취하는 셈이 된다. 곧 어떤 자극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극은 시청각이 합치되는 바깥에서 또 다른 체험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완전히 이 공간이 내외부적으로 닫힌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안민욱의 그간 퍼포먼스/설치 작업들은 관객을 주체로 삼으며 작가가 완전히 사라진다기보다는, 매개되지 않는 관객을 가시화하며 작가의 위치를 연출자로서 포함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곧 이 작업은 일종의 특정 계층 혹은 직업군을 대상으로 한 공공적 성격의 작업으로 환원된다기보다는, 집단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된 개인을 재위치시키며 자유가 절대적으로 없는 개성 없는 일자들의 집단과 분열증을 앓는 개인들의 편차가 만드는 불화의 공동체의 간극을 드러냄으로써 더 넓은 층위의 공공을 재조립/구성하는 위치 조정자로서 희미하게 작가가 존재한다.

 

최근 홈리스의 도시(2016)에서 선보였던, ‘집이 없는(Homeless)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집(Home)을 빼고 남겨진 뭐 없는(-less/without) 상태를 조형적으로 시각화한’ <뭐 없는 것 네가지>(2016), 이번 작업의 흥미로운 참조점을 이룬다. 집의 순수 물리적 요소들, 곧 불투명함, 계단, , 밑을 각각 투명하게 아크릴로 마감하여 드러내며 원래의 용도와는 멀어지며 기괴한 공간이 되는데, 이로써 쓸모를 잃어버린 부유하는 공간의 단편들을 지닌, 어디에도 없는 집을 구성한다.

 

(Home)과 없음(Less)을 각각의 두 단어로 분리하고 결합한 결과는, ‘홈리스라는 사회학적이고 실제적인 이름이 아닌, 추상적이고 물리적인 순수한 상태로 나타난다. 이를 결국 관객에게 집이 없음의 상태를 직면하게 하여 홈리스의 체험을 안기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일차적으로는 사회 현상에 대한 부조리의 알레고리를 보여주고, 다음으로 통상의 사회학적 재현의 문제에서 벗어나며, 마지막으로 관객의 직접적인 체험만을 전시의 조건에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질은 군대에서의 자위하기 힘든 조건을 가시화하는 가운데, 곧장 대안으로 이어지는 비판의 기조를 띠기보다는, 그 같은 사회적 현상 자체에서 체험의 조건을 도출하며 관객을 직접 향하는 이번 작업에서 거의 유사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일어날 수 있는(사실 일어나지 않은) 개별적인 자위행위들은 결국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소급되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취급되며 구체적인 기록들은 쓰레기통 안의 흔적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업은 자위 공간으로 기능하기보다, 자위를 하기 힘든 환경에서 사는 군인들의 열악한 지위, 나아가 자위라는 것을 은폐하는 문화를 비판적이기보다 우화적으로(‘자위의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자위 공간’) 드러낸다. 그리고 미술관 안의 또 다른 안(‘폐쇄 공간’)을 만드는 가운데 개별자로 환원된 현대 미술관 속 관객의 지위를 검토하며 또 다른 부조리의 상황을 연출한다. 방에 있는 동시에 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바깥의 조명과 기계손이 작동됨으로써, 바깥의 사람에게 노출된다. 그리하여 순수한 개별자(관람객)의 지위는 깨지고 이들 간의 암묵적 관계가 형성된다.


김민관(아트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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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적 전회> 기획노트

안대웅 리트머스 큐레이터


전시에 초대된 작업은 다양한 미디어와 방법론을 구사하지만,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참여라는 것에 접근하고 있다. 참여란 무엇인가? 그 유명한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선언 이후, 관객 소외를 극복하려는 미술 실천의 계보를 우리는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종종 다다의 혁신적 미학을 아버지로 삼은 일군의 네오-아티스트를 거쳐, 수잔 레이시나 메리 제인 제이콥스, 더욱 최근엔 타냐 부르게라, 파블로 엘게라 같은 걸출한 사회적 실천가에 의해 계발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는 아마도 해프닝을 시도하며 모던한 예술의 신화를 깨뜨리려고 애썼던 60년대 일군의 실험미술가 집단을 먼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두렁 동인, 서울미술공동체, 일과 놀이 등의 실천적 예술가 집단은 이러한 성과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박찬국이나 박이창식에 와서는 더욱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사회적 실천으로 다분화했다.


초대된 예술가는 이런 흐름 속에 있다. 개념과 행위를 더욱 중시하는 예술의 전통 속에서, 이들은 관람자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제 예술의 방법론으로 삼는다. 물론 관람자가 없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런 예술이 관람자의 행위성을 작업의 몸통으로 채택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술가는 더 이상 모던한 저자나 포스트모던한 비판적 지식인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협업자로서 위치하며, 여기서 관람자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작품을 배회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개입하고 창조하는, 활성화된 행위자, 나아가 창작자로 설정된다. 이런 관계를 통해 예술은 코딩과 디코딩이 필요한 상징적 재현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 차원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예술가와 관람자는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기보단, 말하자면 서로 경쟁하거나 때로는 협력하는, 얼굴을 맞댄 공동체를 이룬다.


참여의 역사

나는 이런 예술에서 나타나는 성질을 간단히 참여미학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참여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참여는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과 의식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언급했듯이, 본격적인 민중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80년대의 두렁 등은 공히 이 계보의 선구자격이다. 이 그룹은 현실과 발언의 비판적 리얼리즘과는 달리, ‘민중’이라는 관람자에 대한 관심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대중 문화 교육을 통해 민중/민족의 현실을 일깨우려 했으며,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나 87년 노동자대투쟁 같은 정치투쟁 현장에서 문화적 지원 활동을 했다. 원동석이 주장했듯이, 민중미술은 ‘민중을 위한’ 미술에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운동’으로 도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민중미술가는 무언가를 착각했던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이 민중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탈춤, 마당극, 풍물, 굿을 제 미술의 내용으로 삼았지만, 우스갯소리로 비유하자면, 아이폰을 보는 것과 아이폰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다른 것이다. 또한 민중미술가가 민중의 형식이라고 하며 개발하고 교육했던 깃발그림, 걸개그림, 이야기그림, 그림놀이는, 실상 투쟁 현장에서 시각 선전물을 스스로 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 즉 혁명을 위한 또 다른 종류의 계몽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민중이라는 민중미술의 관람자는 상상의 산물로, 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민중미술은 엉뚱한 사람에게 ‘민중’이 되기를 강요하고 또 가르치려했던 또 다른 종류의 엘리티시즘이었을지도 모른다.


커뮤니티아트에 와서야 이러한 문제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2010년 전후 빠른 속도로 발전한 커뮤니티아트는 관람자의 행위를 제 실천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작품을 완성해서 관람자에게 제시한다기 보다는, 워크숍 같은 대화 과정 자체가 작품의 형식으로 적극 채택됐다. 이런 예술가는 수재민부터 퀴어에 이르기까지, 억압되고 주변화된 집단을 제 관람자, 즉 공동체로 상정하고 그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 위해 길게는 몇 년간 프로젝트를 지속했다. 이것은 딜레마이기도 했다. 이타적 행위 속에서 커뮤니티아트는 NGO 활동과 질적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 올바름의 미술은 종종 얼마나 프로젝트가 관람자에게 충실했는지를 따지며, 그 정도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려고 했다. 관람자는 여기서 진리의 장소처럼 현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그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커뮤니티아트에는 항상 윤리적인 질문이 해결되지 않고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정말 관람자가 원하는 것이 이게 맞아?” 따위의. 거기다가 그들 예술가는 이런 타자의 윤리에 대한 강박이, 타자를 해방시키기는커녕, 타자를 생산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런 예술은 필요에 따라 타자를 멋대로 상상해낸 다음, 다시 해방시켜야 하는 이중고를 겪곤 했다.


참여의 미학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예술의 식별체제를 윤리적 체제와 재현적 체제, 미학적 체제로 나눈다. 쉽게 이야기해서, 윤리적 체제는 무엇이 진리와 시뮬라크럼에 가까운지를 따져 유용성의 단계를 정하는 체제이며, 재현적 체제는 누가 얼마만큼 그럴싸한 가시적 질서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일반 질서와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느냐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는 체제다. 랑시에르에 있어 윤리적 체제는 “예술을 그 자체로서 개별화되지 못하게”하기 때문에, 그리고 재현적 체제는 가시성을 부여하는 권한을 가진 자가 “주제의 비천함 또는 고상함에 알맞은 표현 형태들과 상황들을 규정”하기 때문에, 둘 모두는 분할을 통해 경계를 만들고 자리를 부여하며 몫 없는 자가 제 몫을 가져가는 행위, 즉 정치를 봉쇄한다.


랑시에르의 이런 식별체제론은 정치적 올바름의 예술의 난점을 잘 설명해준다. 예술가가 공동체와 화합하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순간 그 작업은 윤리적 체제 속에 할당된다. 한편 관람자를 진정한 억압된 타자로 재현하려고 애쓰는 순간 재현적 체제에 할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티아트는 윤리적 체제나 재현적 체제에 복종하면서, 외려 관람자의 해방을 방해한다.


내가 참여에 미학이란 말을 도입하고 싶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소위 사회 참여적 미술은 사회적 실효성에 몹시 경도된 나머지, 윤리적이고 재현적 체제에 복속될 위험에 처하며, 미술이 아닐 수도, 미술일 수도 없는 이중구속의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됐다. 앞서 살펴본 민중미술부터 커뮤니티아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그런 갈등이 반복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쓸모있는 미술이냐 아니냐, 혹은 정의로운 미술이냐 아니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쓸모 있고 정의로운 미술이 되기를 선호했다.


하지만 바로 전 단계로 돌아가서, 혹시 그런 모순적 갈등이 참여적 미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랑시에르가 설명하는 미학적 예술 체제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미학 체제에서는 예술의 식별이 더 이상 행동 방식들 가운데서의 구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술의 산물들에 고유한 감각적 존재 양식의 구별을 통해 행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이질적인 힘, 자신에게 그 자신 낯설게 된 어떤 사유의 힘(비-산물과 동일한 산물, 비-지식으로 변형된 지식, 파토스와 동일한 로고스, 비의도적인 것의 의도 등).”


오늘의 참여적 예술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사용』에서 민주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참여가 일반적으로 권력이 내버려둔 공간을 채우는 문제로 환원된다고 적는다. 그가 논하길, 할당된 참여가 고정된 공간만을 가지며 그 대항력을 지배질서에 의존한다면, 진짜 참여는“예측 불가능한 주체”를 고안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것은 오로지 미학을 경유해야만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의 새로운 참여적 예술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전시에 초대된 구수현, 노들유령, 다이애나 밴드, 안민욱, 최세진의 작업 또한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술가와 관람자가 만들어가는 관계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지만, 그것이 (이성적이라기보단) 감성적인 제스쳐인 한에서 그렇다. 모든 일반 법칙과 재현적 합의는 파괴되며 예술가와 관람자는 매한가지로 불확실성에 몸을 맡긴다. 때로는 유희적으로, 때로는 위반적으로.


가령 이 전시의 <떠돌이 bar 반월 족제비>에서 최세진은 관람자와 노동의 스트레스에 관해 대화하는 와중에 얻은 영감을 칵테일에 즉석으로 녹이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프로그램되지 않은 캐쥬얼한 대화 가운데, 관람자가 술회한 고통스러운 계급적 갈등은 칵테일의 색깔과 맛으로 자리 옮겨진다. 관람자는, 대화를 지속하는 한, 창작의 과정에 계속해서 개입하게 되며, 칵테일을 끝내 들이킴으로써, 언어화되지 않은 노동의 새로운 감성이 일깨워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 진다.


노들유령의 <코스트 팩토리> 또한 노동적 감성의 재배치에 주목한다. 노들유령은 잉여-이미지를 생산하는 일시적 팩토리를 설립한다. 팩토리에서 관람자는 모두가 노들유령이 고용한 일용직 노동자로 설정된다. 그리고서 노들유령은 관람자에게 어떤 생산 활동을 제안하는데, 이를 테면, 준비된 피에로 가면에 페이셜페인팅을 하는 일, 반월공단에서 모은 슬로건으로 만든 스티커와 ‘꿈’ 같은 유토피아적 문구가 각인된 도장을 활용해 엽서를 제작하기, 그것도 아니면 그냥 놀기다. 이런 미션을 클리어 하면 노들유령은 노잣돈을 관람자에게 지급한다. 이것은 유령들이 고안한 놀이의 설정에 불과하지만, 노들유령은 진지하게 이 활동을 자신의 노동자에게 제안하는 가운데, 노동을 한갓 현실 법칙을 초과하는 즐거운 활동으로 전치시켜 버린다. 또한 이 모든 활동은 ‘마스크를 쓴 셀피’를 통해 소셜네트워크 상에 전파된다. 노들유령에게 셀피를 포스팅하는 활동은 중요한데, 신세대의 자기의식적 유희를 전유하는 가운데, 사진을 익명의 자율적 공간으로 제련하기 때문이다. 이때 마스크는 참여의 아이콘이 된다.


감각의 유희는 다이애나 밴드에서 핵심적 위상을 차지한다. 다이애나 밴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일시적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관심이 있다. 관람자가 쿠션이나 플라스틱 폴 등의 레디메이드에 내장된 블루투스 스피커에 스마트폰을 연결한 후, 지정된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일단의 조건이 만들어 진다. 웹사이트는 여러 가지 소리를 내장하고 있어서, 관람자가 스마트폰을 통해 터치를 한다면, 그 신호가 네트워크를 통해 웹사이트에 접속한 모든 관람자에게 피드된다. 이로서 관람자는 일시적인 일종의 밴드 세션맨이 된다. 일견 이런 소셜 오브젝트의 참여적 기능은 오늘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낯설지 않지만, 전시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이런 기술적 성과만은 아니다. 다이애나 밴드의 작업은 인지적 감각을 자유롭게 오고 가는 가운데 그것을 행한다. 이를 테면 <크게말해 조명>은 마이크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상 전구를 마이크 모양으로 설치했을 뿐이다. 이때 실제 피드백 회로는 마이크 옆에 설치된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구성되는데, 이 스피커는 또한 조작된 레디메이드다. 이렇게 다이애나 밴드는 레디메이드적 감각에 의미와 기능에 관객이 재기입할 수 있는 여건을 기술을 통해 조성한다. 이런 재기입의 신호가 소리로 모여 뒤섞임으로써, 일시적인 노이즈의 공동체가 조직된다.


한편 안산유통상가라는 장소가 산업공단으로부터 이어지는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계획된 클러스터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안민욱이 리트머스의 벽면 한쪽을 사용해 만든 조금은 괴상한 형태의 농구 골대가 얼마나 낯선 사물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안민욱은 농구 코트의 기호를 전유하여 벽면에 붉은색 라인 페인팅을 한 후, 거기에 농구 골대를 겹쳐 놓았다. 회색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조형은 언뜻 보기에도 자극적이며, 실제로 그 도발적인 시각성 때문에 행인들로부터 다수의 질문을 받거나 관리사무소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여기서 이 농구 골대가 실제로 사용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농구 골대가 충돌시키는 이미지일 텐데, 그것은 거대 산업 클러스터와 시각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의 다이나믹스 사이의 충돌 같은 것이며, 그런 이미지는 굳이 농구 시합을 하지 않더라도, 심리적인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의 감각은 구수현의 괴담 수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수현의 <안산미스터리닷컴>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홈페이지 상에 수집해 믿거나 말거나 괴담 시리즈를 구성한 작업이다. 괴담은 진실과 허구, 올바른 기억과 착각을 오가는 가운데, 안산의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는데, 대다수는 미술의 산물과 얽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수현의 괴담은 공공장소에 할당된 공식적 아름다움을 다시 쓰면서, 이미 무관심의 대상이 된,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 감각을 음모론적 장소로 다시금 문제화한다. 이를 통해 괴담은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는 행정 미학을 비판하는 한편, 관람자가 기존의 공공미술에 개입할 수 있는 상상의 장소를 만든다.


이 모든 작업은 구체적인 상황이나 실천에 따라 방법과 모습은 다르지만, 실제 사회적 과정에 개입해서 예술가나 작업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거나, 그것을 직접 비판하지 않더라도, 관람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지만 이러 저러한 이유로 억압됐던 감성적 차원을 해방하는 조건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참여미학에서 관람자는 참여를 하는 와중에 스스로를 해방하며 제 몫을 되찾는다. 실로 영어의 participation은 제 몫을 차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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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실천과 비예술적 조건

[안민욱 개인전] 2015.08.04~09.13 문화공장오산


안소연 | 미술비평가


안민욱은 일상에서의 예술적 실천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한 사유는 예술의 쓸모에 대한 스스로의 깊은 회의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일상의 가치로부터 한 발 물러서 있던 예술의 오랜 태도는 수많은 현대의 예술가들로부터 계속해서 도전 받아왔다. 적어도 20세기 초 서구 아방가르드의 실천에서부터 1950~60년대 네오 아방가르드의 실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동시대미술에 이르는 예술가들의 계속되는 사회적 관심 등을 고려해 볼 때 예술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눈에 띄게 좁혀졌다. 그러한 흐름에서 안민욱은 예술적 실천의 사회적 쓸모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현실 사회의 비예술적 조건들에 대해 관찰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술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그것이 작동되는 현실의 사회적 조건이나 구조 등에 특히 관심을 가져왔다.

 

오산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2015년 오산연고 작가 발굴에 선정되어 열린 이번 개인전은, 그가 영국 유학 후 자신의 거주지 오산으로 돌아와 그 지역 공간을 기반으로 모색해 온 작가로서의 활동을 소개한다. 신작을 포함한 총 5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그간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실천하고 경험했던 자신의 예술적 생산 활동과 그때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된 질문을 던진다. 그는 2008아르스(ars)”라는 이름의 예술 사무소를 기획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사회적 환경 조건에 개입하는 일련의 예술적 실천과 그 과정에 주목해 왔다. 전시된 작품 중 <A Dog and A Pram at Wimbledon>(2013)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면, 안민욱은 자신이 만든 성인용 유모차와 바퀴 달린 강아지 모형을 가지고 영국의 윔블던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 일상에 개입한 그의 소소한 실천은 일상 속의 평범한 행위, 즉 유모차를 끌거나 강아지를 데리고 거리를 산책하는 등 특별할 것 없는 일과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의 행위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는 임의의 도구들(instruments)”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그가 작가로서 이웃들의 일상에 개입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자 매개가 된다. 그는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진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의 지점을 모색한다. 예술과 일상, 각각이 충돌하거나 어긋나 벌어진 틈에서 할 수 있는/해야 하는 일들을 작가는 상상한다. 이에 안민욱은 <A Dog and A Pram at Wimbledon>에서 개와 유모차를 끌고 거리를 산책한 것이다. 그가 한 일이라곤 윔블던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걷기뿐이었지만, 그의 걷는 행위에 우리가 새삼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들어 끌고 다니는 특이한 물건들때문이다.

 

이처럼 안민욱은 일상의 어떤 장소 혹은 어떤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을 직접 제작한다. 그는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들로 거대해진 현실의 풍경에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어 그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되 기존의 가치 및 질서에 조금씩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어른을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와 얼굴에 아이패드를 장착한 모형 강아지가 그렇다. 그는 이웃들이 실천하고 있는 일상의 평범한 행위에 직접 가담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행위에 조금 낯선 방식으로 접근하여 보이지 않던 어떤 경계를 벌려놓는다. 신작 <. 아이. 와이 (D. I. Y)>(2015)<바우하우스(Bow House)-초롱이의 집>(2015)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작업 공간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에 대해 스스로 반응하고 개입하면서 생산해낼 수 있는 일련의 결과물들에 초점을 맞췄다. 문화공장 오산 3층 전시실 중앙에 설치된 <. 아이. 와이>는 작가가 작업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이동식 선반이다. 벽면에 크게 출력해서 붙여놓은 그의 작업실 내부 사진을 배경으로 이동식 선반의 쓸모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사회적 필요와 합의를 거쳐 대량 생산된 물건이 아닌, 오로지 사적인 용도로 한 개인이 생산해낸 비합법적인 물건들의 정체를 규명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안민욱은 지금, 작업실 안에 있어야 할 그 이동식 선반을 전시장 한 가운데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것의 쓸모, 기능, 의미 등을 계속해서 되묻는다. <바우하우스-초롱이의 집>은 작가가 키우는 개의 집을 건축가 김영배와 협업하여 새롭게 제작한 프로젝트다. 그의 유머가 엿보이는 이 작품의 제목을 보면, 안민욱은 많은 부분 20세기 초 독일의 조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를 참조하고 있다. 당시 바우하우스가 전면에 내걸었던 실험적인 모토는 그 이름대로 집을 짓듯(Hausbau)” 예술의 기능성을 최대한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예술과 기술의 경계 혹은 그 접점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 어쩌면 안민욱은 한 때 독일의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예술의 생산 방식을 자신의 오산 작업실에서 재가동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안민욱은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이 크게 주목했던 예술의 수행적 가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플랜 비 스테이지 (Plan B Stage)>(2015)2014년 오산의 한 비영리 공간에서 무대 형식으로 설치했던 동명의 작업을 사진으로 찍어, 그것을 배경으로 새롭게 제작된 2015년 버전의 작업이다. 2014년 당시, 안민욱은 전시 공간의 천장 일부를 뜯어내 평상시에는 완전히 가려 있었던 공간을 일시적으로 공개했다. 천장 위로 그 아래만큼의 텅 빈 공간이 숨어 있을 줄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무대를 설치해놓고는 느닷없이 무대가 아닌 그 위로 시선을 옮겨 천장 너머의 쓸모없는 공간을 보라 했다. 그는 공기순환기를 이용해 아래의 공기를 위로 유입시켰고, 천장의 조명은 무대를 비추는 대신 일제히 천장 위 암흑의 텅 빈 공간을 향하게 했다. 결국 쓸모없이 버려진 공간을 조명한 무대는 건축적 설계의 효율성과 그 기능에 의해 쓸모가 박탈되었던 비장소의 현존을 환기시켰다. 따라서 안민욱은 단지 예술의 효용성과 기능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거다. 오히려 그는 현실의 비예술적 조건 내에서 어떻게 예술적 실천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러한 예술의 수행적 태도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어떠한 현실적 발언을 가능케 하는가 등의 사유를 이어갔다.

 

<어둠은 잠시, >(2015)에서 안민욱은 실제의 공간에 대한 또 다른 개입을 시도했다. 이 작업은 애초에 오산 종합운동장 인근의 지하도 공공미술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했던 일인데, 중도에 무산돼 실현되지 못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는 과거의 계획을 수정해 문화공장오산 전시장에서 그것을 실현시켰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하 통로는 참 독특한 공간이다. 마치 동굴처럼 이중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오래된 지하도는 <플랜 비 스테이지>에서의 천장만큼이나 현실에서 우리의 시각 경험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안민욱은 나무 구조물로 재연한 지하도를 전시장에 끌어들여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그 낯선 경험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그는 쉽게 자각할 수 없는 일상의 비예술적 환경과 조건들에 개입해 언뜻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익숙한 상황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때 그는 우리의 비/일상적인 경험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일련의 도구들을 제작함으로써 일상에서의 예술적 실천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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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ic Practices and Inartistic Conditions 

[Minwook An Solo Exhibition] August 4, 2015-September 13, 2015 Cultural Factory Osan

So-yeon Ahn | Art Critic

 

Minwook An thinks about artistic practices in daily life. His thoughts seem to have come from continuous introspection about artists' social roles and a skeptical mindset regarding the use of art. The long-standing approach in art of standing one step away from everyday values has faced continual challenges from many contemporary artists. Considering Western avant-garde practices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experiments of the neo-avant-garde of the 1950s to 1960s, and artists' growing social interest from postmodernism to contemporary art, the distance between art and reality has been significantly reduced. Under this trend, Minwook An observes the social use of artistic practices and current society’s inartistic conditions which carry out these practices. In other words, he has shown particular interest in the venues, social conditions and structures where art is produced and operated.

 

This time An's solo exhibition marks his appointment as a selected artist for the Exhibition for Finding Artists from Osan 2015, hosted by the Osan Cultural Foundation. Having returned to Osan, his hometown, after studying in Britain, he has continued his activities as a local artist, introducing works through the exhibition. Through a total of five works, including new ones, the artist keeps asking questions about the production of his own art, which he practiced and experienced in areas where he lived, and his identity as an artist. Since founding an art office he calls "ars" in 2008, he has carried out various projects and paid attention to a series of artistic practices and their procedures that intervene in environmental conditions. In the video work A Dog and A Pram at Wimbledon (2013), Minwook An strolls down streets in Wimbledon Britain with a pram designed to carry an adult and a wheeled dog that he produced. His small practices intervene in daily life by repeating ordinary activities that are not so special, like walking around streets with a stroller or a dog. However, when carrying them out, he arbitrarily uses instruments, which become important measures and means for the artist to be engaged in neighbors' everyday lives. He does not look for the answer of stale question of "what is art?" but examines the boundary areas instead. He imagines what he can/must do in the gap generated while art and daily life clash and crack. So the artist in A Dog and A Pram at Wimbledon walks a dog and pushes a stroller. What he does is just an ordinary-day walking in Wimbledon, but the walking draws our attention because of the unusual objects he made and carries.

 

An makes various instruments to intervene in certain places or circumstances in daily life. He gains ideas for artwork through real life landscape that have become bloated due to many social factors, and actively engages in such situations and generates small differences in conventional values and orders. A stroller for an adult and a dog with iPad head are the examples. He takes part in the same routines as his neighbors, but at the same time extends invisible gaps between him and others using unfamiliar approaches. The newly made D.I.Y. and Bow House-Cholong's House (2015) are similar: he focused on chains of results generated from his response to and interference with the varied environments and conditions surrounding his workspace. D.I.Y., installed at the center of an exhibit hall on the third floor of Culture Factory Osan, is a movable rack An made to use in his studio. The big photo of his studio is attached on the wall and helps us guess how the rack is used. Unlike mass-produced objects made through societal needs and consent, objects manufactured by an individual for personal use hardly allow people to deduce what they are for. Moreover, by putting the rack that should have been in his studio at the center of the hall, the artist continues questioning its use, functions and meanings. Bow House-Cholong's House, a collaboration with architect Young-B Kim, is a new project to build his doghouse. The title, a reference to Bauhaus, an art school in Germany in the early 20th century, also reflects his sense of humor. As the name hausbau (building a house) suggests, the experimental art school focused intently on the functionality of art, and it was found at the boundaries or borders between art and technology. Perhaps Minwook An tries to re-employ the production method Bauhaus pursued at his Osan studio.

 

Additionally, An is also interested in the performative value of art, which has received huge attention from the modern art world since the 1960s. Plan B Stage (2015) is the 2015 version of his old work of the same name, which was set as a stage at a nonprofit space in Osan in 2014. It is now newly created with the picture of the previous work as a background. In 2014, An removed parts of the ceiling of the exhibition area and temporarily exposed the space that had been usually hidden completely from sight. No one normally recognized that there was an empty space above the ceiling as large as the space below. However, the artist, all of a sudden, asked visitors to turn their eyes to the useless space above the ceiling instead of to the stage he set on the floor. He sent the air from the outside to the top by using an air circulator and faced all the lights towards the empty dark space above the ceiling instead of the stage underneath. Ultimately, the work that lighted the useless abandoned space called people’s attention to the efficiency of architectural design and the existence of the “non-space,” which was functionally stripped of use. As it is, An did not just want to talk about the utility and functionality of art. Instead, he continued asking questions, such as how to promote artistic practices more actively in an inartistic environment or what realistic expression is possible in our society with this type of performative attitude in art.

 

With For A While, The Way into Darkness (2015), An once again tries to intervene in real space. This work was first designed as part of a public art project for underground passages near the Osan Sports Complex but it could not be completed as the project was cancelled midway through. An made some changes in design while preparing this exhibition and displayed it at Culture Factory Osan. Underground passages are unique spaces one needs to pass through to move from one place to another. The old underground passage, which also feels like a cave, subverts our visionary experience in reality, just like the ceiling of Plan B Stage. An makes us immerse ourselves in the out-of-the-ordinary experience of reality by setting the underground passage with wood in the exhibition room. He approaches familiar environments that do not feel special at first by intervening in inartistic environments and conditions we do not really recognize. He pursues the realization of art in everyday life by producing a series of tools that enable the maximization of our ordinary or unordinary experience.

 

Posted by ars2008 트랙백 0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