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안민욱의 회고-미래전

 3 An Minwooks’ Retro-futuro-spective

 

안민욱도, 아르스도, 아마도”

 

 

I. 안민욱(2008- )

 

안민욱은 무해한 사람이다. 그리고 친절한 작가다.

기질이나 습성을 묘사함에 있어 더 적확한 말들이 있겠지만, 멀그스름한 그런 말들만 떠오른다. 그것은 욕망이나 사심의 온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특징-없는 친절함이다. [1] 시류에 휩쓸려 어떤 일에 우르르 달려 드는 법도, 하던 일이 시덥잖게 느껴진다고 재빨리 안면을 바꾸는 법도 없다. 그만의 침착한 호흡이자 원만함이다. 이러한 삶의 정서와 빠르기는 지금까지의 작업의 경로와 나아갈 벡터를 정하는 상수 값이다. 작품이나 전시의 이야기에 앞서 사람에 관한 담화를 하는 일은 공정한 이해와 평가를 훼손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성, 그 위의 작은 디테일까지도 그 사람으로부터 딸려 나온 부산물 혹은 역(逆)부산물이라고 여기는 나 같은 이들에게는 퍽 중요한 이해의 대상이다.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작가의 인격적 기질은 때로 작업의 기초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개인으로서의 무해함, 작가로서의 친절함이라는 것이 자극적 벌스(verse)와 치명적 훅(hook)을 요구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무슨 특징이기는 할까. 삶이 각박하게 치뤄지는 오디션이라면 어쩐지 불리할 것 같은 안민욱의 자기계발사를 되살피는 일은 안민욱의 안민욱-되기, 이따금 안민욱도 되어가는 복수의 과정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이 글은 그러한 용도에 맞추어 쓰여지고 있다. 비평 아닌 관찰의 말로써.

안민욱 작가의 작업들은 일대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뚜렷한 개연성과 드라마가 다소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미술계라는 좁고 특수한 지대 안에서 적절한 이탈과 확장을 통해 정체성을 다져왔다. 경기도 오산에서 나고 자란 안민욱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유년기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보였고, EBS로 만난 밥 로스(Bob Ross)[2]의 영향으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고 한다. 미군 주둔지라는 점 외에 별다른 특징 없는 오산에서 공군 출신의 미국인 화가에 홀리게 된 것만은 드라마적이다. 이후, 역시나 무탈한 고교 시절을 거쳐 대학에서 판화실습을 했던 작가는 미술 유학을 통해 조형 예술과 퍼포먼스의 시각적 언어라는 두 전공 트랙을 거쳤다. 어쩌면, 유학은 가장 박력있는 선택처럼 보인다. 이십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는 개념과 실천에 중점을 둔 퍼포머티브한 설치작가로 변모했다. 이런 류의 기계적 요약이 결여하는 것은 “안민욱이 안민욱” 되기의 과정에서 겪었을 모종의 사회적 아노미, 컴플렉스, 대응 방식이 정교해져 가는 개인의 서사일 것이다.

초기작이자, 대표작에 해당하는 ‘아르스(ars) 프로젝트’는 그런 점에서 그 모든 고민들과 학습된 방법론의 자기 적용이 이루어진 예다. 예술가의 사회적 서비스와 관객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익숙해진 관계적 실천 양식이다. 여전히 특기할 만한 긴 호흡이다. 공식적으로 첫 번째 시즌, 여덟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아르스 계열의 작업들은 근본적으로 ‘예술가 되기’에 대한 제도비평적 질문과 ‘예술 하기’에 대한 자기 증명을 포함한다. 이는 ‘아르스’ 라는 가상의 구조를 빌어 평범한 사람 안민욱이 특별한 예술가 되기를 소망하며 사회적 예술의 외피와 미학적 강령들을 세우고 흉내 내보는 일이다. 2008년의 작업 <예술가처럼 보이기>에서부터 다양한 사회 관계적 서비스를 제공해 온 가상의 에이전시agency이자 에이전트agent인 아르스 즉 “예술”이라는 회사명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예술의 이름은 예술인데, 예술이 아니라면 별로 예술적인 것 같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쨌거나, 성내지않고, 서두르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나온 시간의 끝에 우리는 다시 아르스의 수장이자 말단 직원인 안과 재회한다. 아마도, 12 Years Later!     

 

II. 안민욱 (2014- )

 

안민욱이 돌아왔다. 이 즈음이었으리라.

출발 지점으로의 홈-커밍, 즉 서울과 오산으로의 ‘귀향’은 어떤 분기점을 제공한다. 되돌아온 자리에서 대면한 예술 생산과 수용의 조건들은 새 시점에 맞는 현실인식과 태세전환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전환점을 이해하는 포인트는 유학생 미술[3]가와 현업 미술가가 서있는 주변 생태와 개인 위상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이 즈음의 작업들은 유학 미술을 현장 미술로 옮겨와 평가의 온도를 살피고, 전략을 스리슬쩍 변경해 나가는 모색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런던에서 서울과 오산으로, 카페에서 공장과 나이트클럽으로, 위치와 성격을 변주해 오는 동안 ‘아르스’는 작가의 대표작업이자, 최장기 작업이 되었다. 2014-2016년 사이 전개된 ‘아르스 프로젝트’는 예술 사무소, 화장품과 향수 제조 공장, 나이트 클럽 등 이전에 비해서 좀더 의뢰 받은 작업의 사회적 맥락과 장소성을 반영한 시도들이다. 가변적설치방식과 관계 기반의 퍼포먼스, 장소성의 변형, 연극적 수행과도 같은 요소들은 환대 받을만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것처럼 보인다. [4] 이 시기, 아르스 바깥에서 다양한 지역성을 기반으로 독자적 작업들과 의뢰 받은 기관 협업 작업들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른바, 작업력을 전반적으로 강화시키고, 작업의 몸체와 협업 단위를 불렸다 줄이면서 장르별로 계통을 분화시키는 시기다. 대체로 규모와 예산 면에서 설치와 해체가 가붓하고, 언어 유희를 구사하며, 천연덕스럽게 일상의 풍경에 밀착되어 있는 작업들이다. 특정한 장소(군인밀집 도시)의 내밀한 성적 행동을 서비스 공간으로 드러낸 설치 (마스터 베이비, 2017). 시간성이 작업의 중층을 이루는 시적인 설치(습기로부터, 2018), 미술가 레지던시에서의 일시적 협업 변주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시기)

안민욱이 속해있던 세계의 환경과 태도 설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저런 포석을 두어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껏 시도해 온 각 작업의 특수성과 그것들 간의 연결성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르스 프로젝트가 포괄하는 관계적 서비스들이 다른 작업으로 형질을 변경하고, 의도가 말갛게 비치는 미적지근한 유머가 새로운 온도로 옮겨가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해서 긴요하게 바라 볼 필요는 있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가치 없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련의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들은 실은 자신이 해 나갈 수 있는 역할론에 대한 끈덕진 질문이자 일상적 예술 실천법의 고안과 자습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도화되고, 계층화된 예술계에 대한 담담한 오기를 발사하는 최소한의 정치성이기도 하다. 안민욱이 안민욱 되기를 가열차게 실험하고 연습하던, 끝내 알 수 없을 어떤 전사들을 더듬어가며 빙긋이 웃어본다.

 

III. 안민욱 (2019 -)

 

안민욱도 고뇌한다. 당연한 말이라 괜스레 미안해 진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 퍼포먼스와 관객 참여 기반의 전시를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도 큰 타격감 없어 보이는 평온한 낯빛에 그만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침착한 표정 아래 잠복해 있는 고뇌와 불멸의 밤들을 애써 그려 보게 된다.

작사, 작곡, 기타연주, 힙합 노래. 작년부터 근거리에서 지켜 보아온 그의 일상이다. 아르스에 투영해왔던 정체성의 확장과 예술적 가치의 확인 행위들은 어느 샌 가부터 좀 더 안민욱 그 자신에게 밀착되어 있어 보인다. 결과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을 활동상의 한 부분으로 드러내거나, 예술가의 다양한 부캐(부 캐릭터)놀이는 물론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보내온 노래(혹은 랩 송) <당신은 몰라>를 듣고, 안민욱의 프리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든 가짜회사 아르스 비장하게 만들었지 그때는 불안해서 이십대에 졸업 후 백수가 될 거같아 에이 알 에스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 몰랐던 그때 당신은 몰라 예술가 만드는 프로젝트 진짜가 되고 싶었거든 하지만 대박 까였어 그림이 아니여서 그게 미술이냐고 나에게들 반문했지” [5]

 

2019년의 노래는 시계를 돌려 십년 전 옛 아르스를 끄집어낸다. 남들은 예전 작업 다 지우고, 새로운 작업 빵빵 터뜨릴 때 왠 아르슨가? 창백한 목소리의 자작 래핑 대신 더 힙한 것은 어디 없는가? 물론 나는 안민욱의 쑥스러운 성정과 그럼에도 “용기내어 나댐”을 적극 지지하는 파이긴 하다. 10년전 고민을 한 톨도 못 버리고 살아가는 나라고 다르겠는가 싶기도 하다.

아르스도(arsDo)의 기획안을 건네 받고서 나는 전시가 작가의 때 이른 회고전, 즉 언젠가 회고전의 내용이 될 과거의 시간을 끌어온 전시처럼 읽혀졌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아직 전시장에 가보지 못했고, 알스지엄(arseum) 개관전 설명 때문에 너무 재밌거나 궁금해 미치거나 하지 않다. 그러나 알 것도 같다.

전시는 저 멀리서 아직도 묵묵히 걸어오고 있는 ‘안1’과 얼마 전부터 문 워크로 제자리 걸음 중인 ‘안2’와, 옆 구르기 하며 이상한 방향으로 가 있는 ‘안3’이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일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아마도 미래의 또 다른 안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어제의 이해를 멀리 끌어와 지금 여기서 투영해 보는 친절한 관객이 되어보자. 더욱 친절해 보자. 관객 없는 전시를, 퍼포먼스 취소된 날들을 함께 나며, 내일의 어떤 존재들을 만나보자.

안민욱도, 아르스도, 우리도, 아마도

 

 

 

 글 조주리(전시기획, 미술비평)

 

 


[1] 작가에게 ‘특징이 없다’는 것에 담긴 함의에 대하여 몇 가지 주석을 달고 싶다. 첫째는 그와 그의 작업에 특정한 교육 배경, 지역 색, 계급적, 매체적 특징을 암시하는 단서들이 비교적 옅게 느껴지는 점이다. 둘째, 안민욱이 전개해 온 일련의 작업들이 뚜렷한 시각성을 창출하는 일, 소위 ‘시그니쳐’ 작업이라 할만한 요소들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동시대 미술 환경이 은근하게 요구하는 작업의 전략적 특질이나 방법론으로부터 슬며시 비껴가는 것 같은 인상 때문이다.

 

[2] 1942년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에서 태어났고, 미국 공군에 20년간 복무하였으며 1981년 미국 공군 상사로 예편하였다. 친구 Annette와 1981년에 밥 로스 클래스를 열었으며, 1983년 미국 PBS에서 방영된 '그림을 그립시다'(The Joy of Painting)라는 TV 프로그램으로 미국 내에서 유명 화가가 되었다. 로스의 그림에 눈 덮힌 산이나 침엽수림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근무지인 알래스카주에서의 경험에서 유래되었다. (설명 출처: 위키피디아, 마지막 검색일: 2020년 4월 1일)

[3] 유학미술의 현장미술로의 이행은 단순한 예술가의 지리적 좌표나 생태계의 변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작업의 지속을 위한 금전적 비용과 협업망, 예술기금이나 공간 제도와 같은 행정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소위 ‘유학생 미술’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신체를 재료 삼아 시도되는 퍼포먼스, 고현학적 수집, 탐사 행위, 장소에 적합하지만 지워져야 하는 조각적 설치, 개인적 리서치에 기반한 소규모 프로젝트 등이 일반적으로 채택되는 방법론이다. (가용할 수 있는 제도와 자본, 지성의 총량을 가늠해 봄으로써)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포기와 인정은 또 다른 틀에서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예술의 양식과 일상적 방법론의 창안과 실천을 추동하는 네거티브 에너지이다. 

[4] 다양한 개별 프로젝트는 이전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없는’ (less) 시리즈- “뭐 없는 네 가지”, “벽이 없는”, “밑이 없는” 등의 작업들은 좀 더 조각적, 디자인적 시각성이 강하다. 반면 “합치된 납치극”은 연극적 수행이, 지방 도시에서의 커뮤니티형 작업들은 일상적 장소성에 대한 독해와 언어적/시각적 번안이 더욱 중요한 요소다.  

 

[5] <당신은 몰라>, 작사, 작곡: 안민욱 / 노래: 안민욱(feat.김우유)

  원곡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Vu0TbxYH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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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n Minwooks’ Retro-futuro-spective

                                                                     

“Minwook An-DO, ars-Do, Ama-DO”*

*Translator’s note: In Korean, ‘-DO(-도)’ means ‘too’ or ‘also’ when it is used as a suffix. And, the word, ‘amado(아마도)’, refers to ‘probably’ or ‘maybe’. In this case, ‘Ama-DO’ has a double meaning indicating both ‘probably’ and the name of the exhibition space, Amado Art Space.

 

I. Minwook An (2008- )
Minwook An is a harmless person. And, he is an attentive artist.

Although there must be more accurate adjectives for describing one’s trait or nature, I can come up with only these subtle expressions. An’s kindness is ‘tasteless’1) which is irrelevant to an egoistic desire or hidden motives. An has not easily followed trends, neither has he quickly changed his stance when he is disappointed by what he is working on. The kindness comes from his stable and amicable nature.

 

His pace and attitude towards life can be a constant which ultimately decides the future direction and vectors of his practice. Sometimes, talking about an artist prior to his or her works and exhibitions might have an unbiased influence on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however it also can be significant for someone like me who treats tiny details of an artist as either crucial byproducts or counter-byproducts of the person. Although I do not agree with the expression-‘Physiognomy is Science’, artists’ personality can be fundamental grounds for their creation at times. 

On the other hand, I wonder how can the harmlessness as an individual and the kindness as an artist be distinct features in the current era where provocative verses and attractive hooks are required. Re-examining the self-improvement story of Minwook An, who seems to have some disadvantages if life were a severely competitive audition, can be necessary to comprehend his multiple accesses to ‘Being Minwook An’ or ‘Being Minwook An-DO’. To satisfy this specific purpose, I am writing this text. It will be ‘A Peer Review’ similar to an observation record rather than a critical review.

 

From a biographical point of view, An’s practice slightly lacks accidental dramas or clear plausibility between events. On the contrary, with a close look into each aspect of his practice, we can discover that he has established his authentic identity through moderate attempts to extend and break away from the small art world distinct from other sectors. Born and raised in Osan, Gyeonggi-do, An’s artistic talent was acknowledged in his early years (like the majority of artists’ cases), and Bob Ross’2) painting TV program on EBS had a critical impact on him to sign up for private art classes. It is fairly dramatic that little An was suddenly being fascinated with the American painter, an ex-army from the U.S Air Force, in Osan-a nondescript place except its political and geographical side of being one of American military bases in South Korea.

 

After spending normal teenage years and receiving a degree in Printing at university, he studied Fine Art and Visual Language of Performance in London. Perhaps, it must have been the most ambitious decision on his life track. At the point of his 20’s end, he became a contemporary artist dealing with performative installations on the foundation of concepts and practice. What this mechanical summary lacks are a certain anomic state and an inferior complex he might have experienced throughout the process of ‘Being Minwook An of Minwook An’ and personal narratives of his challenges and reactions which have been getting sophisticated. It is one chapter of a short story when seen in long-shot, but an epic in close-up.

 

In this context, ‘ars Project’, one of his early works and representatives, is an appropriate example of which his concerns and self-adoption of educated methodologies are efficiently employed. As the project requires the artist’s social services and viewers’ participation, it takes a relatively familiar mode of presenting relations. What attracts my attention is his long-as much as being silly-pace. Officially, the ars series consists of the first season and eight episodes which basically include system-critical questions about ‘being an artist’ and self verification of ‘doing art’. In short, the project is a demonstration of aesthetic principles and external roles of public art achieved by Minwook An who is an ordinary person constructing the virtual structure-ars, with a hope of being an extraordinary artist.

 

The hypothetical agency and agent, ars, has provided a variety of social-related services since <A Project That Makes One Look Like an Artist>(2008). It is meaningful that An decided the name of the project as ‘ars’ whose linguistic origin is a Latin word referring to art. Thus, he designated art as art, and it is intriguing that this project has constantly caused occasions which can not be artistic enough if they did not have the title of art.

Having been patient and persistent without give-up, we finally have a reunion with An who is both a leader and a junior employee of ars.

Amado, 12 Years Later!    

 

II. Minwook An (2014- )
Minwook An returned. It must have been this season.

An’s homecoming to his starting place, back to Seoul and Osan, offered him a turning point. The terms for art production and assessment that he encountered at the returned place demanded him newly perceive the reality and adjust old attitudes to the changed tense. To grasp the necessity of his transition,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each individual artist’s hierarchical status in the horizontal art-ecosystem where artists who had been working in the field and artists who had studied abroad were equally treated.3) His practice about that time can be summed up as ‘a seeking process’, slightly shifting his original schemes by observing the criticisms he received when he brought outcomes of his overseas education into the context of the field art. While he has played with variations in locations and structures-from London to Osan and Seoul, or from a Café to factories and night clubs- ‘ars’ has become his most representative work and the longest project.

 

The ars project between 2014 and 2016 showed several attempts more aggressively reflecting social contexts and site-specific aspects such as activities in an art office, cosmetics and perfume manufacturing lines and night clubs. They certainly possess several factors, which are easily welcomed and accepted by the current art tendency, including the variable installation style, performances based on relations, humorous analysis and arbitrary alterations on site-specificity, theatrical processes and proactive collaborations.4) 

In this period, An also dealt with commissioned collaborative projects and community-oriented independent works outside of the ars’ range. Thus, it was a phase that he reinforced his productivity and systemized his works according to genres by attaching and detaching the main body of works with collaborative units. These works are mostly simple to install and deconstruct in terms of budgets and scales, often using puns, and nonchalantly adhering to daily landscapes. It is more evident in some works such as ‘Master Baby’(2017) constructing a space implying private sexual behaviors in a specific environment (the city whose population of soldiers is high); ‘From Mist’(2018) whose poetic installation contains time-based elements; Variations of temporary collaborations in art residencies including the SeMA Nanji Residency. 

I have applied several strategic interpretations on his activities in order to understand An’s stance and the environment he belongs to. Nevertheless, I do not entirely grasp the specificity and connectivity of each work he has presented, but I believe that it is significant to pay careful attention to his fundamental perspective towards art and to what remains while the relational services of the ars project have shifted their characters in different works and its tepid humors with transparent intentions have been keener. His performances and installations which have addressed questions about art’s social worth and its futility are not only a persistent inquiry about his own role, but a process of his sincere investigation to discover a practical method of achieving daily art. In addition, they illustrate An’s minimum political gesture in bold defiance of the art world’s hierarchy and conservative system. Dwelling on An’s previous traces of experimenting and practicing ‘being Minwook An’, now I smile. I grin.  

 

III. Minwook An (2019 -)
Minwook An also has angst. It sounds absurd as it is matter-of-course. Even though he had to give up on his initial plan for the exhibition whose central elements are performances and the audience’s participation due to the unexpected situation of the social d-i-s-t-a-n-c-i-n-g, An’s calm manner without being restless ultimately gives me a sense of relief. On the contrary, I also can visualize endless nights of anguish he managed to hide underneath his composed face. Since last year, I have witnessed his daily life comprised of songwriting, playing the guitar and hip-hop music at close range. From a certain moment, his activities of extending his own identity and revising various artistic values have steadily permeated into him. It is not completely rare for artists to deliberately expose amateurism as one aspect of their practice or to generate diverse sub-characters to play with. Yet, in his case, it is difficult to discover any astute intention from Minwook An who was making stiff dancing movements, hesitantly picking up the guitar chords and diligently singing with his thin voice. The song (or rap) he sent me few days ago, ‘You Do Not Know’5), can be his prequel.

 

“The fake company ars I was determined I was anxious I thought I would be unemployed with my degree in my 20’s a. r. s. I didn’t know how to be an artist YOU DO NOT KNOW the project making an artist I wanted to be real but I was totally kicked out they told me NO-painting ain’t art” 

 

The song written in 2019 confesses how ars was originated ten years ago. Why has An returned to ars when other artists announce new works instead of holding old ones? Is not there something trendier than self-composed lyrics of faint voice? Nevertheless, I am one of the people who support him to be ‘a courageous go-getter’ in spite of his timid nature. When I read his proposal for this exhibition, I got this impression that it could be ‘a premature retrospective’ borrowing past times which will be contents for a one-day-in-the-future retrospective exhibition. Hence, the exhibition introduces us the inverted tense, ‘retro-spective’ and ‘futuro-spective’ at the same time.

 

While I am writing this review before visiting the exhibition, I am not either of being thrilled by his proposal or being extremely curious to find out the show. But, I know. I know that the exhibition will allow you to encounter three An(s); ‘the first An’ who is still silently walking from the distance; ‘the second An’ who is Moon-Walking at a standstill; ‘the third An’ who is rolling sideways towards an unexpected direction. Exhibiting his past-selves, he suggests us to meet another An of the future.

So, let us be considerate viewers who pull yesterday’s understanding out of the past to reflect them on today. Be more considerate. Meet more of tomorrow’s presences, overcoming days of canceled performances and absent visitors.

Minwook An-DO, we-DO, ars-DO, Am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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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 want to comment on why I chose the expression, ‘tasteless’, to describe the artist. First, I can hardly find clues that imply his particular educational backgrounds, regional characters or hierarchical and material factors in An’s practice. Second, the series of his works rarely includes ‘signature’ works which present the artist’s evident aesthetic languages. Third, he gives an impression that he slightly eschews strategic approaches or methodologies the current environment of the contemporary art scene implicitly requires.

2)   Bob Ross was born in Daytona Beach, Florida. After his 20-year tenure with the U.S Air Force, Ross was discharged as the first sergeant in 1981. With his friend, Annette Kowalski, Ross opened his own class, and later, he became a celebrity painter through an instructional program, The Joy of Painting, aired from 1983 to 1994 on PBS in the United States. The experience of serving military service in Alaska had a great influence on recurring themes of his practice such as snowy mountains and conifer trees. (Reference: Wikipedia, latest date of searching: 01. 04. 2020)

3)   The transit from the oversea education to the actual art field does not simply stand for shifts of the artist’s geographical coordinates or working circumstances. Due to a shortage of financial costs and network for producing new works and administrative resources providing funding or facilities, artists who studied abroad naturally look for new strategies. The methodologies often include performances whose main medium is body, researches of modern social phenomena, investigative approaches, temporary site-specific sculptural installations and small projects based upon private researches. Admitting and giving up the unfeasible (by estimating the limit of system, budgets and their intellectual ranges) can generate a negative energy that paradoxically triggers new valid artistic modes and methodologies for creating art which is ‘nevertheless’ or ‘thereby’ possible only for them.

4)   The various individual projects in this period provoked impressions different from his previous. An’s ‘-less’ series such as ‘Four Things About –less’, ‘Wall-less’ and ‘Bottom-less’ showed an intense visual effect which had more elements of design and sculpture; in the case of ‘The Agreed-Kidnapping-Play’, the theatrical enforcement is crucial; the interpretation and linguistic/visual adaptations of ordinary places are more underlined in An’s community-oriented works presented in small cities.

5)   <You Do Not Know>

Lyrics and Music by Minwook An, Song by Minwook An (feat.Ooyou Kim),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Vu0TbxYHjE

 

 

 

Juri CHO(Curator, art critic)
(translated by Jung Su)

 

Posted by ars2008 :

박성환(아마도예술공간 책임큐레이터)

 

2008, 안민욱은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며 예술가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가상 예술 회사 아르스를 만들었다. 이후 작가는 아르스와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공존하며 일상과 닿아있는 퍼포먼스를 벌여 '사적인 공적 공간'에서 ()''()', '예술을 위한 장''일상'을 겹겹이 반전시켰고 공공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소속작가 안민욱을 미술계에 독립시킨 아르스는 휴업상태가 되었고, 안민욱은 공적인 사적 공간에서 오프 뮤지엄적인 시도와, 공과 개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전개하며 예술의 프레임을 확장시켰고, 이 과정에서 관객을 작업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다.

 

작가의 활동은 능동적 관객의 참여를 바탕으로 '직접행동'을 취지로 하는 퍼포먼스 중심의 비물질적 작업과 전시기획 혹은 전시장의 특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개념적인 작업이 상황 특정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전시에 사용된 조형물의 일부, 사진기록이나 인쇄물, 당시 참여자와 목격자의 기억 등 단편적으로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개인전 구성을 고민하게 하였다.

 

헛된 고민이었다. 작가는 종종 전시가 벌어지는 장소의 의미와 상황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다른 가능성을 알아보고 본질을 다르게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안민욱은 주제를 찾아 머릿속을 배회하지 않아도 상황에 놓인 조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접근하게 되는 우발성을 자신만의 필연성으로 끌고 온다. 이 때 발생하는 구조감은 순전히 대상을 생각해야만 하는 비자발성이란 조건에서 발생하기에 의외성을 품은 유쾌한 공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일상을 작품으로 되게 만드는 힘이 그것이다. 그렇게 이전에 아마도예술공간에서 하지 않은, 앞으로도 아마도예술공간에서 하지 않을 전시를 만들기 위한 논의가 시작 되었다.

 

우리는 아르스를 재가동 시키기로 한다. 공적 영역에서의 조건들을 비틀며 만들어냈던 특유의 위트를 바탕으로 한 아르스. 작가 개인에게 있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다시금 개화한 안민욱. 이 둘을 대면시킴으로써 부감되는 작가의 특성을 더욱 명확히 구분지으려 했다. 그렇게 기획된 전시 <아르스도>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거듭한 시간 여행이며, 외부상태(안민욱)과 내부상태(아르스)가 모두 존재하는 평행세계이다. 물론 둘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술적 성과에서도 마찬가지로 동등한 가능성의 결과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동등한 가능성의 결과가 아닌 발생하고 있는 두가지 현상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안민욱의 작품처럼 장소와 개념의 이전이 불가능한 작품들은 모두 미술관 비판으로서의 측면을 갖고 있는데, 물론 미술관측도 이러한 논점의 등장에 민감해 1970년대 이후에는 오프 뮤지엄에서 전개된 미술작품을 어떻게 회수하고 가치를 판단해 나가는지가 미술관의 중요한 책무가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오프 뮤지엄의 미술관화는 좀처럼 현실화 되고 있지 않다. 형식과 제도를 이용 하지만 그 자체를 신뢰하는 것은 아니며 기존의 형식이나 제도가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면, 작가는 무리하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부수거나 적어도 다시 묻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에 아르스는 유일한 소속작가인 안민욱 개인을 위한 뮤지엄 알스지엄을 만들어 제공하며 미술관과 대안공간이란 공적 영역을 비트는 위트를 보인다.

 

반면 안민욱은 알스지엄에 전시된 작품들로 개인의 서사를 풀어낸다. 젊은 작가의 이러한 회고에는 전시가 끝나면 잠정적으로 작업을 이루던 조건들은 해체되기 마련인 비물질의 작업을 발화했던 조건들과 분리 시켰을 때 어떠한 형태로 제도권 안에 편입시킬 수 있는지,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 예술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지, 모든 개념적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숙명과도 같은 고민이 담겨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스지엄이 작품으로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은 오히려 확고하다고 볼 수 있다. 왜 아르스는 안민욱을 위해 알스지엄을 개관하였으며, 왜 안민욱은 알스지엄을 고전회화전시 형태를 차용하여 풀어냈는지 엮이는 순간 아마도예술인 것에 방점을 찍는다.

 

<아르스도>는 작가 안민욱을 통해 전시의 내용에 접속되기보다 전시의 내용을 바라보는 것으로 작가에게 다가가게 되는 역색인(inverted index) 구조의 전시인 것이다. 아르스를 현재의 상황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일상과 예술의 관계, 공개(公個)적 미술가로서의 안민욱의 경계를 다시 묻기 위해서도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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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ung-hwan(Amado Art Lab Curator)  

 

In 2008, Minwook An established a hypothetical art company ars, addressing questions about practicality of art and requisites to being an artist in the current society. For a brief period, An and ars co-presented several performances closely related to daily life in an attempt to reverse ambivalent notional layers such as domains for art and an ordinary environment, or publicity and individuality. The company has been dormant since Ans independence, while An has extended his artistic territory and consequently attracted viewers into his course of creation by experimenting off-museum attempts within a public-private structure and by opening discourses about the boundary of publicity and individuality.

 

Since Ans major activities are either non-material works based upon participatory performances which encourage viewers to take an actual action, or conceptual works whose situation-specific elements stem from distinctive qualities of given exhibition spaces and curatorial intentions, his documents of the previous works contain only some parts of installations, photographic footage, printed materials, or memories of the participants and viewers which are too fragmental to suggest the entire context of his practice. Considering this practical limit, it seemed to be natural to have apprehension at constructing a basic format of the exhibition.

 

It turned out to be unnecessary concern. Minwook An often adopts an exhibition spaces background meanings and situations as a reference; this approach efficiently opens diverse opportunities and interpretations of inherent properties of the space. Without wandering in search for subjects, he shifts contingency into his own justification by sensitively responding to conditions of the designated circumstances. At this moment, this dependency upon the targets enables An to create a certain structure whose pleasant flow conveys unexpected effects. This is his force of transforming daily life into art. Thus, we could begin our discussion about constructing the exhibition which has not happened before at the Amado Art Space and will not be ever again.

 

We decided to reactivate ars. ars has its peculiar wit caused by deliberately distorting conditions of public areas. Minwook An is re-acknowledged by his investigation into what art signifies for each artist. As the artists unique characteristics can be overlooked when these twoars and Minwook Anare juxtaposed, this exhibition attempts to clearly separate An from ars. In this context, <arsDO> is not only a time-travel repeating the artists past and present, but a parallel world where the interior state(ars) and the external state(Minwook An) coexist. As they have equivalent value, we might expect a possibility of the same artistic achievements of the two agents, however we ought to pay more attention to two different appearing phenomena rather than the even results.

 

In terms of art trends, works whose space and concept are unchangeable often take the critical stance towards museum-oriented presentations, and Ans practice shares this attitude. Although museums have sensitively responded to this issue and they admitted that one of their responsibilities was collecting these off-museum artworks and valuing them since the 1970s, delivering off-museums into museums has barely realized. When the reliability in conventional systems decreases despite their availability and the systems no longer embrace emerging ideas, artists are inevitably demanded to deconstruct or re-examine the existing frames instead of artificially adjusting themselves to the norms. Accordingly, ars humorously twists the stereotypical border dividing museums and alternative spaces by providing the museum, arseum, to its only member, Minwook An.

 

On the other hand, An unfolds his private narratives in the works displayed at arseum. This retrospective point of view employed by the young artist ultimately reveals every conceptual artists unavoidable inquiries; is it reasonable to include immaterial artworks in the current territory of contemporary art when their temporary prerequisites essential to letting them art are dissolved after the show?; which aspects are involved if we define them art? In this sense, the ground which makes arseum a piece of art is rather clear. When the reason why ars opens arseum for Minwook An and the intention of which An adopts the structure of classical painting exhibitions are combined, maybe-art finally becomes art.

 

<arsDO> takes an inverted-index structure encouraging the audience to approach the artist by appreciating the exhibited works, instead of accessing the contents of the exhibition through Minwook An. Summoning the ars project to the present moment is significant to discuss the relationship of art and daily life, and also to examine the borderline identity of Minwook An as a public-individual artist.

 

(translated by Jung Su)

Posted by ars2008 :



'예술의 종언'과 미학적 일상 이후의 삶과 예술(가)-곽영빈 2018


1. 작가의 초기작인 <예술가처럼 보이게 만들기>(2008)는 일반인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소위 '예술가'의 모습을 스스로 연기해 보게 하는 얼핏 단순해 보이는 컨셉의 작업이다. 이는 작가의 이후 몇몇 작업이 그러하듯 얼핏‘참여예술’, 혹은 '관계미학'의 형태로 가시화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오랜 탐색을- 어떤 의미에선 시대착오적으로-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기원'이 그러하듯, 그것의 운명은 그 자신이 아니라 후속 작업들에 의해 사후적으로 수정 또는 정교화되고 (재)규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가장 나중에 (되돌아) 온다. 그러한 '사후의 시점'에서 볼 때 이 작업은 어떻게 보일까? 이 질문은 안민욱 작업의 중핵이 시각적인 것이라기보다 바로 이러한 '시간적 시점'이라는 의미에서 결정적이다.


2.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안민욱의 작업은 예술이 보편화된, 혹은 예술과 삶을 결합시키려 했던 아방가르드의기획이 어느새 생각보다 시시하고 평범하게 완료된 '(미래)완료시제'의 시점에서, 삶과 예술(가)의 존재 방식을 탐문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단언은 단순해보이지만, 사실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다. 이는 그것이 무엇보다‘시간‘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즉, 어떤‘이후’가 문제라면, 시간적으로 그 이후에 작업 중인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들도 모두 그‘이후’에 속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그러한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아쉽게도 이 자리는 이러한 질문들의 무게에 걸 맞는 논의를 펼칠만한 곳은 아니다. 이러한 시공간적 제한을 염두에 둘 때 일단 출발점 으 로 삼기에 유용한 것은 , ‘ 미 학 화(aesthetization)’라는 프로젝트는 이제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그것은‘디자인’과‘예술’의 미학화로 구분된다는 그로이스의 제안이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일상에 대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미학화 프로젝트는 이미 완성되었다. ‘실질적으로 완수되지 않은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상식적 반론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여전히 굳건한데, 그것은 그러한 아방가르드 프로젝트의 근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세상을 바꾼다’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한 일상, 즉 삶의‘미학화’는 세상을 바꾸거나 최소한 개선하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전제. 이것을 그는‘예술’(의 미학화 기획)과 구분해‘디자인의 미학화’라 부르는데- 정확히 30년 전인 1988년 출간된 자신의 출세작에서 그가 도발적으로 묘파했듯- 그 20세기적 범례로 스탈린이라는‘총체 예술가’가 인민을 재료로 역사의 전시장에 발표한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을 두고 있다는 건 자명하다.

물론 그는 이후의 과정 전부를 세공하진 않지만, 그것이 프레드릭 제임슨이“포스트모던 감각의 새로운 삶”이라 이름 붙인 지각 혹은 경험 양태의 전지구적 창궐, 즉 이미지의 포화를 통해 가속화된 미적경험의 편재화와 함께 실질적으로나 잠재적으로 미학화된 일상에 다다른 후, 니콜라 부리오에 의해 한 시대를 (과거 시제로) 풍미한 이른바‘관계미학’, 즉 이러한 (자본주의적) 미학화 과정과 더불어 내파된 것이나 다름없는 사회(성), 즉 관계 자체를- 일시적으로나마- 만들어내는 것으로 예술을 (재)정의하는 기획들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안민욱의 작업은 바로 이 시점에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육화한다. 즉 '성취의 우울(melancholy of success)'도, 카톡 메시지도, 하다못해 DM도 없이 이미 도래해버린 '예술의 종언이후'의 시점에서 예술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때 삶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일 수있는가?


3. 안민욱에게 이러한‘종언’의 감각은 어떤 맥 빠진 완료, 또는 지루한 충만과 잉여의 감각으로 체현되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지금은 '은퇴'해 시간이 남아도는 미술가- 그의 이름은 무려 '반 고흐'다-와 카페에서 나누는 가상의 담소(<아르스 카페>, 2012)나, 부족하기는커녕 넘치는 빛, 그리하여 차양막을 필요로 하거나 조도의 감소를 요구하는 빛- 혹은 그것의 부재-의 알레고리를 통해 매개되기도 하고 (<어둠은 잠시, 도>, <차양막>), 난지도 캠핑장 옆에 세운 컨테이너 안에서만 작동하는 와이파이와 에어컨 바람처럼, 정작 그것이 놓인 해당 장소에는 잉여적이거나 별 쓸모없는 요소를 제공하는 형태(<아르스 쓸모 없는 예술 사무소>, 2014), 혹은 전시장 천장 위와 지붕 사이에 죽어 있던 공간에 공기를 순환시키고 빛을 쏘되, 정작 그렇게 드러난 공간을 사용하지는 않는 방식(<플랜 비 스테이지>, 2016)으로 변주되어 왔다.

이에 비해, 한국과 영국 사이에서 작가의 수공업적인 매개를 통해 이뤄지는 물물교환(<교환er>, 2009), 일반영어 학원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아르스 영어예술학교>(2014), 한국 나이트클럽의 '부킹' 형식을 차용한 파티인 <알스비안 나이트>(2016)와 같은 작업들은, 삶과 예술 사이의 상호교환, 혹은 자리바꿈의 작업이 매끈해 거의 구분이 불가능해진 지점을 효과적으로, 다시 말해 후줄근하게 가시화한다.


4. 실지로 <알스비안 나이트>에서 웨이터 역할을 수행한 작가는 종종 '작가'로서 인지되지 않았는데, 이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도슨트 역할을 떠맡았던 작가 안드레아 프레이저의 퍼포먼스(1989)나, 참여자들에게 국수를 떠주던 티라바니자의 '관계미학' 작업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강조했듯 이러한 혼동과 해석이야말로, 앞에서 언급한 다른 작업들과의 관계 속에 놓일 때 말 그대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할 것이 <커먼 바>와 <카페 넌지>, 그리고 <오픈 스튜디오>이다. 먼저 <커먼 바>는 2018년 4월, 서울 상암동 난지 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흘간 열린 12기 난지 아트쇼 <쇼!룸!>에 그가 애너 한 작가와 함께 만든 공간으로, 일반 관람객들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작가들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만든 곳이다. “난지에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작가들이“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기여하기 위해“바”처럼 만들어진 이 공간은‘카페 넌지(Cafe Nunji)’와도 연동하는 작업인데, 그가 박경률, 염지희, 조경재 작가와 함께 스튜디오 2층의 죽은 공간이자 자신의 방 바로 앞 외부 공간에 조성한 이 곳 역시 기본적으로 입주 작가들을 위한 곳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공간들의 독특한 위상이다. ‘예술과 일상’이라는 (시대착오적) 이분법을 들이댈 때, 이 자리들은 하나 같이 애매하다. 이곳은‘예술’을 하는 아티스트들의 공간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예술이나‘작업’의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은, 예술과 배타적으로 구분되는‘일상’의 공간 또한 아니다. 이곳은 난지 미술창작스튜디오라는, 아티스트들이 매년, 그것도 한시적으로 머무는 공간이며, 모든 작가들이 매일 매일의‘일상’을 전적으로 사는 곳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오픈스튜디오’를 위해 그가 만든 <오픈스튜디오> 역시 이러한 독특한 시공간의 특정성을 적절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주로 현장에서 설치를 하는 성향의 작업들이 많아 특별히 보여줄 작업이 없”었다는 변명(?)과,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오픈스튜디오의 특성을 인스타그램과 중첩시켜, 그는 레지던시 생활에 사용하는 책상, 의자, 및 책과 같은 물건들을 정사각형으로 만들려 했는데, 높은 천장과 좁은 폭을 특징으로 하는 스튜디오의 구조 덕분에 이는 결국 85×250×254.4(cm)의 육중한 직사각형 구조물로 귀결되었다. 예를 들어 ‘이 작업이 (어떻게) 예술작품인가?‘라는 질문은, 이 작품을 구성하는 물건들이 귀속되고, 작품이 전시된‘레지던시’라는 물질적, 행정적 공간이‘예술’에 속하는가 아니면‘일상’에 속하는가라는, 투박하고 시대착오적인 질문이 실질적으로 전치된 것인데,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듯 안민욱은‘‘예술’과‘일상’을 접목시킨다‘는 식의 접근이 전제하는 분리‘이후’의 시간 감각을‘미술창작센터’라는 공간적인 차원에서 직조함으로써 스스로를 명확하게 분리해낸다.

소재는 다르지만, <마스터 베이비>(2017)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작업이다. 군부대가 많은 강원도 홍천에 머물게 된 작가가, 10여 년 전 역시 군인 신분이었던 자신을 떠올리고“우연히 부대 주변에서 들린 미술관에서 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바램으로 만들었다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군인들이 자위를 할 수 있게 만든 1인용 부스다. 핑크색으로 변색된 군복의 위장 패턴은 언뜻 이용백 작가의 <엔젤 솔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은 반짝이는 LED로 부스 밖에서 찬연히 빛나는 <MASTER BABY>라는 제목, 혹은 광고판과, 부스 안에 설치된 섬세하게 구비된 의자와 휴지통, 물티슈와 루브리컨트용 젤 등의 자위용 물품들을 통해 순식간에 증발한다.

얼핏 짓궂어 보이기도 하고, 요즘처럼 젠더 문제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전면화된 시점에서 보면 일찍이 이브 세즈윅이 남성들끼리의 동성사회성(homosociality)이라 비판했던 것의 연장선상에 놓인 내부자 농담(inside joke)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작업의 중핵은 그런 피상적 차원과는 거의 무관하다. 이 작업의 관건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유사한 시공간적 예외성의 물질화 차원에 있다. 분홍색으로, 그것도 찬란한 LED조명과 함께 덩그러니 서있는 이 부스는 수다스런 광고판이나 다름없는데, 그 안에 들어가 조명을 키면 밖에서 ‘ENGAGED'라는 표시까지 켜져 자위라는 내밀한 행위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부스가 타겟으로, 혹은 위로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사실, 즉 20여개 월 남짓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혹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로 대체되는 ‘한시적 존재’라는 점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1년마다 대체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속 아티스트들과의 공명은 물론,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오픈스튜디오> 작업과의 유사성을 더욱 내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공개되다 못해 노골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이 기이한 사적 공간은, 소위 일반인들의‘일상’과 유리된 채 전적으로 사적이지도, 전적으로 공적이지도 않고, 전적으로 예술적이지도 전적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생활이 한동안 이어지는‘레지던시’라는 한시적 공간의 짝패인 것이다.


5. 안민욱의 다른 작업들 역시, 이러한‘시점’도는‘시차’의 문제설정을 전제로 놓고 보아야만 그 위상이 훨씬 명확해 진다.

예를 들어 유학 후 귀국한 작가가, 키우던 개의 낙후된 개집을 개조한 <바우 하우스 Bow House-초롱이의 집>(2015)을 보자. 이는 물론 독일의 ‘바우하우스 Bauhaus’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제목이 우회적으로 시사하는 유머- 개와‘bow’의 조합은 bowwow, 즉 ‘개(짖는)소리’를 상기 시킨다-가 웅변하듯, 그들의 기획을‘시대착오적’으로 지속하려는 의지와는 무관해 보인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현실개선’이라는 그들의 예술적 이상이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인데, 이를 작가는 ‘인간적 현실’이 아닌‘개의 현실 개선’이라는 차원으로 전치시키고, 그것을 다시‘개의 시점’에서 바라본다- 혹은 그의‘동의’나‘확인’을 구한다-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차원에서 구현함으로써‘바우하우스’의 유토피아적 기획을 우스꽝스럽게,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공간적이면서 때론 시간적인‘전치’, 혹은 (시대/범주)착오의 감각은 <윔블던의 개와 유모차>(2013)처럼, 어른을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나, 실제 강아지를 필요 없게 만드는 아이패드 화면을 장착한 애완동물 모형 갤러리에 놓인 작업실 용 이동식 선반(<D.I.Y>, 2015), 또는 실제 게임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낮게- 역시 갤러리에- 설치된 농구골대와 농구공(<참여-바구니-공>, 2017) 등으로 변주되기도 하고, 앞에서 살펴본 <카페 넌지>나 <난지넌지; 난해한지도>(2018년 8월)처럼 언어 영역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6.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작가의 최근작 중 하나인 <합의된 납치극>(2016)의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전까지의 몇몇 작업을 다소 위태롭게 지지하고 있던 공동체성과 '관계미학'의 맹점, 즉 합의(consensus)와 공통감각에 근거한 공동체(sensus communis)라는 전제를 시각성의 차원에서 참가자들과‘함께 시험에 부친다(con-test)’는데서 찾아진다.

예를 들어 '합의' 하에 작업에 동행한 참여자들은 이후의 피드백에서 자동차가 불편했다거나 봉고차에 동승한 어시스턴트들의 불친절함을 지적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의되었던 것 아닌가? 그들은 '납치'에 '합의'하지 않았던가? 아니라면, 그들의 '합의'는 어디까지 동의되었던 것인가? 얼마만큼의 '편의'와 안락함이 이 이벤트를 말 그대로 '납치극'으로 만드는가? 무엇보다 참여자들이 이벤트 내내 안대를 해야 했다(blindfolded)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작가의 다른 작업들이 때론 혼동을 불사하며 다가갔던 참여(participation)라는 '관계미학'의 나이브한 전제는 여기서 명시적으로 의문에 부쳐진다 . 즉 '이전까지 수동적이거나 제한적인 관객(spectator)에 불과했던 이들이 이 작업에는 '전적으로 참여했다(fully participated)''는 식의 묘사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관계미학’이 구성하는‘참여’의 환상을 역설적으로‘교환’과‘동의’를 통해 내파시킴으로써, 안민욱은 전자가 담당했던 예술적, 혹은 사회적 기능의 환상을 간지럼 태우다 못해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가 <커먼 바>나 <카페 넌지>, <마스터 베이비>와같은 사례를 통해 강조했던 지점들, 다시 말해 그들이 여전히‘참여’하는 것처럼 보이는‘예술과 일상’의 문제, 또는‘관계미학’과‘공동체’라는 이슈들은 이 작업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안민욱의 작업들은 예술과 일상의 접목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무의식적) 인식 위에 서며, 그렇게 김빠진‘일상의 미학화’, ‘미학화된 일상’이후의 일상과 예술은 무엇일 수 있는가라는 역사적 감각을 잉여와 쓸모없음이라는 벡터 속에서 육화한다. 특히 <홈리스의 도시>(2017) 전에 포함되었던, 말 그대로‘홈(Home)’이 제거된‘없는(-less)'이라는 의미를 투명한 계단, 벽 등으로 물질화 하는 <뭐 없는 것 네 가지>는, 쓸모없음과 잉여의 문제를 청년세대나 노동자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섣불리 ‘사회화’하지 않고, 오히려‘예술’이야말로 그렇게‘없는’존재가 되었다는, 즉‘일상과의 접목’이라는 예술의‘고향(Home)’과 같은 사명이 이미 완수되었다는 의미에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존재가 되었다‘는 역사적 인식을 수더분하게 형상화한다.

얼핏 맹맹해 보이는 안민욱의 작업들 앞에서, 순수한 예술의 외피를 게으르게 변주하는‘예술(적)’작품들이나, 예술과 일상을‘접목’시키려 여전히 애쓰는 고뇌의 포즈들은 성실한 소극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각자가 서있(다고 생각하)는 장소와 시간을 확인해두자.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더.



곽영빈은 미술평론가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 영화와 비교문학과에서「한국 비애극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의 멤버이자 리더로 노래와 작편곡을 병행, 일본의 아카펠라 그룹 '트라이톤', 재즈 싱어 게이코 리 등

과 협연했으며, 2015년 「수집가 혹은 세상의 큐레이터로서의 작가: 구동희론」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 최초의 국공립

미술관 평론상인 제1회 SeMA-하나 비평상을 수상했다. 코넬 칼리지, 서울대, 홍익대, 한예종 미술원 등에서 발터 벤야민, 구로

사와 아키라와 버스터 키튼, 매체미학과 영상 및 현대사진이론에 대해 가르쳤고, 타마스 왈리츠키와 리쥐촨과 함께 2016 서울국

제실험영화페스티벌의 심사위원을, 2017년 제17회 송은미술대상전과 제4회 포스코 미술관 신진작가 공모전 심사를 맡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현대미술과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디지털) 매체미학의 교차점을 성찰한다.



Life and art (artist) after “the end of art” and aesthetic daily life

 

                                                                                             Kwak, Young-bin

Art critic/Ph.D. in Film studies

 

 

1.   The artist’s earlier work A Project That Makes One Look Like an Artist (2008) is a seemingly simple conceptof work of having general participants to act out their definition of“ artists.”Similar to the artist’s few artworks afterwards, it looks like a “Participatory Art”or become visible in a form of“ Relational Aesthetics”or maintain a long avantgarde quest of “the border between life and art” in a somewhat anachronic way.

 

However, as it goes for all “origins,”the destiny gets modified or elaborated or (re)defined by later works, and in that sense, it comes (back) at the latest. From that “post-exhibition perspective,”what does this work mean? This question is important in a sense that the core of the work by Minwook AN is not something visible but“ the time point.”


2.   Simply put, AN’s work is an attempt of investigating the existence method of life and art (artist) from a “(future) perfect tense”time point, when the art is universalized or when the avantgarde plan of combining art and life is already shrewdly and plainly completed

 

This statement looks simple, but it actually presents complicated problems. That is because it touches the issue of “time.”In other words, if “post- “ is a problem, then do all the work of other artists done in the later time also fall into that “post- “ category? If not, then what is the standard of the classification? Unfortunately, this is not a place for discussion of those serious problems. Considering such time and spatial limitation, it is convenient start from Groys’suggestion that the project called “anesthetization”is not one but two and is classified as anesthetization“ design”and“ art.” According to Groys, the anesthetization project of avantgarde art on daily life is already completed. Despite of the logical opposition that “the substantially unfulfilled area still exists,”such proposition stands strong because the idea of “changing the world”in a broad sense is the basis of the avantgarde project. Daily life through art, in other words, the idea that “anesthetization”of life refers to changing or at least modifying the world and ultimately making the life abundant through this. He calls this “anesthetization of design”by separating it from (anesthetization plan of) “art,” as he provocatively tore down in his first work published exactly 30 years ago in 1988 and it is certain that an example of 20th century legend is the 20th century Soviet Union presented at the historical exhibition using the people by “whole artist”named Stalin. 

Of course, he does not craft the whole process afterwards, but it can be seen as a connection of plans that (re) define art by making -temporarily- the relationship itself, which is the society (sociability) that is imploded along with the (capitalist) anesthetization process, which is so-called“ relationship anesthetization” that once overruled a generation (in the past tense) by Nicolas Bourriaud after reaching the practically and potentially anesthetized daily life along with lateralization of an accelerated artistic experience through image saturation, which is the awareness or experience of global outbreak that was named as “new life of postmodern sensation”by Fredric Jameson.

AN’s work artificially located itself in this time point to raise the following questions. In other words, what is art in the time of “post-end of art”that has already come without “melancholy of success,”KakaoTalk messages, and even DMs? Or what can it be? And what is the life then? Or what can it be?

 

3.   An presents such sensation of “ end” as a disappointing completion or boring fulfillment and surplus sensation, and it has been variated into, for example, an imaginary conversation at a cafe with an artist who “retired”and has much time on his hand his name is Van Gogh”ars cafe (2012) or it is mediated by allegory of surplus light that requires shading net or a decrease of light intensity or the lack of such For A While, The Way into Darkness, 借養莫(Cha Yang Mak), a type that is surplus to the place it is placed in or provides unnecessary factors, like Wi-Fi and airconditioning that only work in the container built next to the Nanji camping site ars The Office of Useless Art (2014) or a type of circulating the air and lighting the dead space between the roof and ceiling of the exhibit and not using the space after all Plan B Stage ( 2016).

 

4.   In fact, the artist who took the role of waiter in arsviAn Night was often not recognized as an “artist,” and this looks similar to Andrea Fraser’s performance(1989) of acting Philadelphia art museum docent and the “anesthetization of relationship”work by Tiravanija, who distributed noodles to participants. However, as I emphasized earlier, this kind of confusion and interpretation appears to be “anachronistic”when it is pu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other works. What is the significant point that is Common Bar, Cafe Nunji, and Openstudio. First, Common Bar is a space he created with Anna Han at the 12th Nanji Art show <Show! Room!> that opened for 10 days at the SeMA NANJI RESIDENCY, Sangam-dong, Seoul in April 2018. He did not avoid having general audience, but it was specially designed to have “a good time with artists.”This space is related to “Cafe Nunji,”as it was made like a “bar”to help artists who “feel like they are isolated in Nanji”to have “a good time with fellow artists,”and the dead space of the 2nd floor of the studio, in the outdoor space right in front of his room with Artists PARK Kyung Ryul, YEOM Ji-hee, and KyoungJae CHO is also basically a space for renting artists. 

     The main idea is the special status of these spaces. When apply the (anachronistic) binary fission called “art and daily life,”these spaces all lose their stance. These are spaces for artists who make“ arts”but are not a space for general sense of art or “work.”However, at the same time, this is not a space of “daily life”that is classified exclusively from art. This is a space called SeMA NANJI RESIDENCY, where artists every year temporarily stay and is not where all artists fully spend their“ daily life”of every day. 

     At the same time, Openstudio that he made for “open studio”is a work that appropriately presents the characteristics of time and space. With an excuse that “he had not much to show since he mostly does work of on-site installation”and by combining the characteristic of the open studio in showing something with Instagram, he tried to make objects like desks, chairs, and books used in residency life as square, but because of the high ceiling and narrow width of the studio’s structure, the objects were made into big rectangular structure in the size of 85 x 250 x 254.4 (cm). For example, the question of “(how) is this an art work?”refers to rough and anachronistic question of does the physical and administrative space of “residency,”where objects are contained and the work is exhibited, belongs to “art”or “daily life,”and as we have pointed out previously, An clearly separates by weaving the time sensation of “post- “classification based on the approach of “combining “art”and “daily life””at a spatial level of “art creative center.”

     Materials are different, but Master Baby (2017) is also an interesting work in this sense. The artist who happened to stay in Hongcheon, Gangwondo, where there are many military bases, thought of himself who was also serving the military 10 years ago and made the art work with a wish that“ it would be nice if people who visited the art museum near the military base by chance saw the work.”This work is basically a 1-person booth for solders to masturbate. The pink military pattern looks like Angel Solder series by LEE Yongbaek, but the similarly instantly goes away through the shiny LED title or the advertisement board Master Baby outside the booth and the detailed masturbation products, such as chair, trashcan, wet tissue, and lubricant gel. It looks childish in a sense or from a point of view with the globalized gender problem, it looks like the inside joke extending from what Eve Sedgwick criticized of homosociality of males, but the core of this work is almost irrelevant from such superficial level. The main theme of this work is in the level of materialization of time and spatial exceptionality, similar to what we observed earlier. The pink booth with flamboyant LED lighting stands there like a shouting advertisement board, and once the light inside is on, the sign that says “ENGAGED”outside the booth turns on, which makes it impossible to do an intimate activity like masturbation. Moreover, this booth’s target or subject of consolation are Korean soldiers, who exist for 20 months and disappear or are “ temporary existence” that is (continuously) replaced by others, strengthens the similarly with the rectangular Openstudio work as well as the artists in the residency program who are replaced every year, as we have looked at earlier. In other words, this strange private space that is open and even explicit is a mate of the temporary space called “residency,”in which life that is not completely private or public or artistic or daily continues for a certain time period, separated from the so-called general public’s “daily life.”


5.   AN’s other works also come clear once they are seen with the basis of setting the problem of such“ time point” or“ time difference.” For example, let’s take a look at Bow House (2015) by an artist who came back home after studying abroad and renovated the old house of his dog. This is of course based on German “Bauhaus,”but as the humor that title discreetly presents the combination of dog and“ bow” is bowwow, meaning the “dog barking sound” shows, it seems irrelevant to the intention of “anachronically”maintaining the plan. This is because the artistic idealism of “reality improvement”is already completed, and the artist displaces this to a level of “the reality improvement for dog”instead of“ human reality” and takes a look at it from the “dog’s perspective again or asks for his “agreement”or “confirmation” which presents practically impossible utopia and makes the utopian plan of“ Bow House”an anachronical one. As such, the spatial and timely “transposition”or anachronical sensation transforms into an animal doll with an iPad that makes real dogs useless, a portable shelf for work located in the gallery D.I.Y (2015), or baskets and basketball installed too low in the gallery again for a real game Participation-Basket-Ball(2017) and sometimes melt into the language area like previously mentioned Cafe Nunji or <Could Be Me Could Be You, Sophisticated Map>(August 2018).

 

6.     In this sense, the interesting point of one of the artist’s recent works The Agreed-Kidnapping-Play (2016) is found in putting the consensus and common sensationbased sensus communis to“ con-test”with participants at a visual level, which is the blind spot of sensus communis and “relationship anesthetization”that was barely supporting the previously works. For example, the participants of this work under “consensus”pointed out the uncomfortable vehicle or unfriendliness of assistants in the feedback. However, was this not agreed upon? Did they not give a “consensus”for“ kidnapping?”If not, then how far does their “consensus”go to? How much “comfortability” and homey feeling make this even a “kidnapping incidence?”Through the simple fact that participants had to be blindfolded throughout the event, the naive proposition of “relationship anesthetization”called participation for which other works of the artist approached despite of confusion comes into question here. In other words, a description like “the people who were previously passive or limited spectators were fully participated in this work” is impossible. By paradoxically imploding this kind of idealism of “participation”that “relationship anesthetization” composes of through “exchange”and “consensus,”An teases the idealism of artistic or social function and even makes it uncomfortable. The parts are that we emphasized through cases of Common Bar, Cafe Nunji, and Master Baby, in other words, the problems of “art and daily life,”through which they look like they are still “participating”or the issues of “ relationship anesthetization” and “community”clearly appear to be anachronical with this work. AN’s works stand on the (unconscious) stance that art and daily life are already combined and the historical sensation of such disappointing “anesthetization of daily life”and what daily life and art after the “anesthetized daily life”are incarnated in the vector called surplus and useless. In particular, “Four things missing something”that materialize the meaning of “less”without “home”with clear stairs and walls included in <The City of Homeless>(2017) does not “socialize”the problem of useless and surplus as social phenomenon of young adult generation or workers but humbly pictures as a historical recognition that “art”has become such“ less”existence, meaning that the“ home”-like mission of art called “grafting into daily life”is already completed and has become “a transparent existence despite its existence.”

     In front of the plain-looking works by AN, the “art(works)”that lazily change the envelope of pure art or the contemplating poses of trying to“ graft”art and daily life are likely to appear as sincere farce. Therefore, let’s check the place and time that everyone (think they) are standing at. Let’s check one more time (again) just in case.



Kwak, Young-bin as an art critic, he received his doctorate in a thesis called “the Origin of Korean a sad drama”at the

department of Comparative Literature and Cinema of the University of Iowa, U.S. and as a member and

leader of the acapella group, he performed both songs and composition, along with Japanese acapella

group ‘Triaton,’jazz singer Keiko Lee and others and he won the 1st SeMA-Hana Criticism Award, the first

National Art Museum Review Award hosted by the Seoul Museum of Art for “a Collector or an Author as a

Curator of the world: KooDonghee’s theory.” In 2015 Also, he taught about Walter Benjamin, Kurosawa

Akira and Buster Keaton, media aesthetics, video and modern photography theories in Cornell College,

Seoul National University, Hongik University, and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 and along with Tam?s

Waliczky and Li Juchuan, he was a judge of the 2016 Seoul International Experiment Film Festival, and the

17th SongEun Art Awards in 2017 and the 4th POSCO Museum’s new artist contest. He is currently a

researcher at the Sungkyunkwan University’s Comparative Culture Research Institute, reflecting on the

intersection of contemporary art, audio-visual images and (digital) media aesthetics.

Posted by ars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