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적 전회> 기획노트

안대웅 리트머스 큐레이터


전시에 초대된 작업은 다양한 미디어와 방법론을 구사하지만,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참여라는 것에 접근하고 있다. 참여란 무엇인가? 그 유명한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선언 이후, 관객 소외를 극복하려는 미술 실천의 계보를 우리는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종종 다다의 혁신적 미학을 아버지로 삼은 일군의 네오-아티스트를 거쳐, 수잔 레이시나 메리 제인 제이콥스, 더욱 최근엔 타냐 부르게라, 파블로 엘게라 같은 걸출한 사회적 실천가에 의해 계발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는 아마도 해프닝을 시도하며 모던한 예술의 신화를 깨뜨리려고 애썼던 60년대 일군의 실험미술가 집단을 먼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두렁 동인, 서울미술공동체, 일과 놀이 등의 실천적 예술가 집단은 이러한 성과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박찬국이나 박이창식에 와서는 더욱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사회적 실천으로 다분화했다.


초대된 예술가는 이런 흐름 속에 있다. 개념과 행위를 더욱 중시하는 예술의 전통 속에서, 이들은 관람자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제 예술의 방법론으로 삼는다. 물론 관람자가 없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런 예술이 관람자의 행위성을 작업의 몸통으로 채택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술가는 더 이상 모던한 저자나 포스트모던한 비판적 지식인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협업자로서 위치하며, 여기서 관람자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작품을 배회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개입하고 창조하는, 활성화된 행위자, 나아가 창작자로 설정된다. 이런 관계를 통해 예술은 코딩과 디코딩이 필요한 상징적 재현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 차원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예술가와 관람자는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기보단, 말하자면 서로 경쟁하거나 때로는 협력하는, 얼굴을 맞댄 공동체를 이룬다.


참여의 역사

나는 이런 예술에서 나타나는 성질을 간단히 참여미학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참여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참여는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과 의식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언급했듯이, 본격적인 민중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80년대의 두렁 등은 공히 이 계보의 선구자격이다. 이 그룹은 현실과 발언의 비판적 리얼리즘과는 달리, ‘민중’이라는 관람자에 대한 관심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대중 문화 교육을 통해 민중/민족의 현실을 일깨우려 했으며,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나 87년 노동자대투쟁 같은 정치투쟁 현장에서 문화적 지원 활동을 했다. 원동석이 주장했듯이, 민중미술은 ‘민중을 위한’ 미술에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운동’으로 도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민중미술가는 무언가를 착각했던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이 민중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탈춤, 마당극, 풍물, 굿을 제 미술의 내용으로 삼았지만, 우스갯소리로 비유하자면, 아이폰을 보는 것과 아이폰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다른 것이다. 또한 민중미술가가 민중의 형식이라고 하며 개발하고 교육했던 깃발그림, 걸개그림, 이야기그림, 그림놀이는, 실상 투쟁 현장에서 시각 선전물을 스스로 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 즉 혁명을 위한 또 다른 종류의 계몽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민중이라는 민중미술의 관람자는 상상의 산물로, 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민중미술은 엉뚱한 사람에게 ‘민중’이 되기를 강요하고 또 가르치려했던 또 다른 종류의 엘리티시즘이었을지도 모른다.


커뮤니티아트에 와서야 이러한 문제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2010년 전후 빠른 속도로 발전한 커뮤니티아트는 관람자의 행위를 제 실천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작품을 완성해서 관람자에게 제시한다기 보다는, 워크숍 같은 대화 과정 자체가 작품의 형식으로 적극 채택됐다. 이런 예술가는 수재민부터 퀴어에 이르기까지, 억압되고 주변화된 집단을 제 관람자, 즉 공동체로 상정하고 그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 위해 길게는 몇 년간 프로젝트를 지속했다. 이것은 딜레마이기도 했다. 이타적 행위 속에서 커뮤니티아트는 NGO 활동과 질적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 올바름의 미술은 종종 얼마나 프로젝트가 관람자에게 충실했는지를 따지며, 그 정도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려고 했다. 관람자는 여기서 진리의 장소처럼 현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그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커뮤니티아트에는 항상 윤리적인 질문이 해결되지 않고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정말 관람자가 원하는 것이 이게 맞아?” 따위의. 거기다가 그들 예술가는 이런 타자의 윤리에 대한 강박이, 타자를 해방시키기는커녕, 타자를 생산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런 예술은 필요에 따라 타자를 멋대로 상상해낸 다음, 다시 해방시켜야 하는 이중고를 겪곤 했다.


참여의 미학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예술의 식별체제를 윤리적 체제와 재현적 체제, 미학적 체제로 나눈다. 쉽게 이야기해서, 윤리적 체제는 무엇이 진리와 시뮬라크럼에 가까운지를 따져 유용성의 단계를 정하는 체제이며, 재현적 체제는 누가 얼마만큼 그럴싸한 가시적 질서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일반 질서와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느냐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는 체제다. 랑시에르에 있어 윤리적 체제는 “예술을 그 자체로서 개별화되지 못하게”하기 때문에, 그리고 재현적 체제는 가시성을 부여하는 권한을 가진 자가 “주제의 비천함 또는 고상함에 알맞은 표현 형태들과 상황들을 규정”하기 때문에, 둘 모두는 분할을 통해 경계를 만들고 자리를 부여하며 몫 없는 자가 제 몫을 가져가는 행위, 즉 정치를 봉쇄한다.


랑시에르의 이런 식별체제론은 정치적 올바름의 예술의 난점을 잘 설명해준다. 예술가가 공동체와 화합하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순간 그 작업은 윤리적 체제 속에 할당된다. 한편 관람자를 진정한 억압된 타자로 재현하려고 애쓰는 순간 재현적 체제에 할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티아트는 윤리적 체제나 재현적 체제에 복종하면서, 외려 관람자의 해방을 방해한다.


내가 참여에 미학이란 말을 도입하고 싶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소위 사회 참여적 미술은 사회적 실효성에 몹시 경도된 나머지, 윤리적이고 재현적 체제에 복속될 위험에 처하며, 미술이 아닐 수도, 미술일 수도 없는 이중구속의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됐다. 앞서 살펴본 민중미술부터 커뮤니티아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그런 갈등이 반복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쓸모있는 미술이냐 아니냐, 혹은 정의로운 미술이냐 아니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쓸모 있고 정의로운 미술이 되기를 선호했다.


하지만 바로 전 단계로 돌아가서, 혹시 그런 모순적 갈등이 참여적 미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랑시에르가 설명하는 미학적 예술 체제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미학 체제에서는 예술의 식별이 더 이상 행동 방식들 가운데서의 구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술의 산물들에 고유한 감각적 존재 양식의 구별을 통해 행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이질적인 힘, 자신에게 그 자신 낯설게 된 어떤 사유의 힘(비-산물과 동일한 산물, 비-지식으로 변형된 지식, 파토스와 동일한 로고스, 비의도적인 것의 의도 등).”


오늘의 참여적 예술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사용』에서 민주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참여가 일반적으로 권력이 내버려둔 공간을 채우는 문제로 환원된다고 적는다. 그가 논하길, 할당된 참여가 고정된 공간만을 가지며 그 대항력을 지배질서에 의존한다면, 진짜 참여는“예측 불가능한 주체”를 고안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것은 오로지 미학을 경유해야만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의 새로운 참여적 예술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전시에 초대된 구수현, 노들유령, 다이애나 밴드, 안민욱, 최세진의 작업 또한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술가와 관람자가 만들어가는 관계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지만, 그것이 (이성적이라기보단) 감성적인 제스쳐인 한에서 그렇다. 모든 일반 법칙과 재현적 합의는 파괴되며 예술가와 관람자는 매한가지로 불확실성에 몸을 맡긴다. 때로는 유희적으로, 때로는 위반적으로.


가령 이 전시의 <떠돌이 bar 반월 족제비>에서 최세진은 관람자와 노동의 스트레스에 관해 대화하는 와중에 얻은 영감을 칵테일에 즉석으로 녹이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프로그램되지 않은 캐쥬얼한 대화 가운데, 관람자가 술회한 고통스러운 계급적 갈등은 칵테일의 색깔과 맛으로 자리 옮겨진다. 관람자는, 대화를 지속하는 한, 창작의 과정에 계속해서 개입하게 되며, 칵테일을 끝내 들이킴으로써, 언어화되지 않은 노동의 새로운 감성이 일깨워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 진다.


노들유령의 <코스트 팩토리> 또한 노동적 감성의 재배치에 주목한다. 노들유령은 잉여-이미지를 생산하는 일시적 팩토리를 설립한다. 팩토리에서 관람자는 모두가 노들유령이 고용한 일용직 노동자로 설정된다. 그리고서 노들유령은 관람자에게 어떤 생산 활동을 제안하는데, 이를 테면, 준비된 피에로 가면에 페이셜페인팅을 하는 일, 반월공단에서 모은 슬로건으로 만든 스티커와 ‘꿈’ 같은 유토피아적 문구가 각인된 도장을 활용해 엽서를 제작하기, 그것도 아니면 그냥 놀기다. 이런 미션을 클리어 하면 노들유령은 노잣돈을 관람자에게 지급한다. 이것은 유령들이 고안한 놀이의 설정에 불과하지만, 노들유령은 진지하게 이 활동을 자신의 노동자에게 제안하는 가운데, 노동을 한갓 현실 법칙을 초과하는 즐거운 활동으로 전치시켜 버린다. 또한 이 모든 활동은 ‘마스크를 쓴 셀피’를 통해 소셜네트워크 상에 전파된다. 노들유령에게 셀피를 포스팅하는 활동은 중요한데, 신세대의 자기의식적 유희를 전유하는 가운데, 사진을 익명의 자율적 공간으로 제련하기 때문이다. 이때 마스크는 참여의 아이콘이 된다.


감각의 유희는 다이애나 밴드에서 핵심적 위상을 차지한다. 다이애나 밴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일시적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관심이 있다. 관람자가 쿠션이나 플라스틱 폴 등의 레디메이드에 내장된 블루투스 스피커에 스마트폰을 연결한 후, 지정된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일단의 조건이 만들어 진다. 웹사이트는 여러 가지 소리를 내장하고 있어서, 관람자가 스마트폰을 통해 터치를 한다면, 그 신호가 네트워크를 통해 웹사이트에 접속한 모든 관람자에게 피드된다. 이로서 관람자는 일시적인 일종의 밴드 세션맨이 된다. 일견 이런 소셜 오브젝트의 참여적 기능은 오늘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낯설지 않지만, 전시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이런 기술적 성과만은 아니다. 다이애나 밴드의 작업은 인지적 감각을 자유롭게 오고 가는 가운데 그것을 행한다. 이를 테면 <크게말해 조명>은 마이크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상 전구를 마이크 모양으로 설치했을 뿐이다. 이때 실제 피드백 회로는 마이크 옆에 설치된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구성되는데, 이 스피커는 또한 조작된 레디메이드다. 이렇게 다이애나 밴드는 레디메이드적 감각에 의미와 기능에 관객이 재기입할 수 있는 여건을 기술을 통해 조성한다. 이런 재기입의 신호가 소리로 모여 뒤섞임으로써, 일시적인 노이즈의 공동체가 조직된다.


한편 안산유통상가라는 장소가 산업공단으로부터 이어지는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계획된 클러스터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안민욱이 리트머스의 벽면 한쪽을 사용해 만든 조금은 괴상한 형태의 농구 골대가 얼마나 낯선 사물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안민욱은 농구 코트의 기호를 전유하여 벽면에 붉은색 라인 페인팅을 한 후, 거기에 농구 골대를 겹쳐 놓았다. 회색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조형은 언뜻 보기에도 자극적이며, 실제로 그 도발적인 시각성 때문에 행인들로부터 다수의 질문을 받거나 관리사무소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여기서 이 농구 골대가 실제로 사용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농구 골대가 충돌시키는 이미지일 텐데, 그것은 거대 산업 클러스터와 시각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의 다이나믹스 사이의 충돌 같은 것이며, 그런 이미지는 굳이 농구 시합을 하지 않더라도, 심리적인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의 감각은 구수현의 괴담 수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수현의 <안산미스터리닷컴>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홈페이지 상에 수집해 믿거나 말거나 괴담 시리즈를 구성한 작업이다. 괴담은 진실과 허구, 올바른 기억과 착각을 오가는 가운데, 안산의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는데, 대다수는 미술의 산물과 얽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수현의 괴담은 공공장소에 할당된 공식적 아름다움을 다시 쓰면서, 이미 무관심의 대상이 된,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 감각을 음모론적 장소로 다시금 문제화한다. 이를 통해 괴담은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는 행정 미학을 비판하는 한편, 관람자가 기존의 공공미술에 개입할 수 있는 상상의 장소를 만든다.


이 모든 작업은 구체적인 상황이나 실천에 따라 방법과 모습은 다르지만, 실제 사회적 과정에 개입해서 예술가나 작업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거나, 그것을 직접 비판하지 않더라도, 관람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지만 이러 저러한 이유로 억압됐던 감성적 차원을 해방하는 조건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참여미학에서 관람자는 참여를 하는 와중에 스스로를 해방하며 제 몫을 되찾는다. 실로 영어의 participation은 제 몫을 차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Posted by ars2008 트랙백 0 : 댓글 0